풀려나는 돈의 폐해
금과 은의 교환비율: 역사적 전환
1873년, 미국은 화폐주조법(Coinage Act)을 통과시키며 은화를 법정통화에서 제외했다. 이로써 복본위제(Bimetallism)는 기능을 멈추고 금본위제로 전환되었다. 제도 전환 자체는 시대 흐름처럼 보일 수 있지만, 복본위제는 단순한 과도기적 화폐체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국제 통화 질서의 균형을 지탱하는 핵심 시스템이었다. 역사적으로 은은 금보다 채굴량이 풍부했고, 보다 넓은 지역에서 통용되었다. 금과 은은 각국의 채굴량과 수요 변화에 따라 자연스러운 교환비율을 형성했고, 이 비율은 국제 무역에서 환율과 유사한 조정 기능을 수행했다. 일부 국가는 금본위제, 다른 국가는 은본위제를 채택했으며, 일부는 복본위제를 유지했다. 서로 다른 제도를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도 무역과 결제는 일정 수준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복본위제는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이러한 국제 금융의 환율 조정 장치로 기능해 왔다.
문제는 시장이 아닌 정부가 교환비율을 고정하면서 발생했다. 미국은 1792년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15:1로 법으로 정했다. 그러나 실제 시장에서는 은의 상대 가치가 하락하면서 교환비율이 15.5~16:1 수준으로 변동했다. 이 괴리는 고평가 된 금이 시장에서 사라지고, 저평가된 은만 유통되는 ‘그레셤의 법칙’을 초래했다. 금은 외국으로 유출되었고, 미국은 국부 손실을 겪게 되었다. 정부가 법정 비율로 시장을 제어하려 했던 시도는 결국 통화체계의 왜곡으로 이어졌고, 복본위제의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각국은 지속 불가능한 복본위제를 포기하고, 안정적인 단일본위제를 선택하게 된다. 은본위제와 금본위제 중 국제적인 수용성과 대외 신뢰도가 높은 금본위제가 선택되었고, 이후 세계는 본격적인 금본위제 시대로 이행하게 된다.
은본위제 폐지: 1873년의 범죄
1873년 미국이 화폐주조법을 통해 은화를 법정통화에서 제외하고 금본위제로 완전히 전환한 결정은 이후 ‘1873년의 범죄(Crime of 1873)’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제도적 전환이 단순한 정책 조정이었다면 '범죄'라는 표현은 과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 구조와 정치적 여건을 고려하면, 은의 폐지가 가져온 파장이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국은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860년대 미국의 농산물 중 82%가 수출되었고, 1870년대 기준 제조업에 종사한 근로자는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농업은 여전히 미국 경제의 주력 산업이었고, 농민들은 대개 부채를 기반으로 농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봄에 대출을 받아 종자와 장비를 구입하고, 수확 후 농산물을 판매해 부채를 상환하는 순환 구조 속에 있었다.
하지만 은이 화폐 체계에서 제외되면서 미국 내 통화량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이는 곧바로 심각한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통화 공급의 축소는 화폐의 실질 가치를 높이고, 반대로 상품 가격을 하락시켰다. 농민들은 같은 금액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더 많은 농산물을 팔아야 했으며, 부채의 실질 부담은 점점 더 커졌다. 수입은 줄고 채무는 늘어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미국 전역에서 농민들의 경제적 파산이 이어졌다. 디플레이션의 충격은 농업 부문에 국한되지 않았다. 농촌 경제의 붕괴는 지역 사회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고, 1890년대에는 농민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포퓰리스트들은 은본위제의 부활을 적극 주장하며 '은화자유주조(Free Silver)'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러한 정치 운동이 농민들의 경제적 불만과 결합하여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1873년의 범죄의 진상은 금과 은 중 어느 금속이 우월한가 가 아니었다. 본질적인 문제는 화폐 공급의 급격한 축소였고, 그것이 불러온 디플레이션이 실물 경제에 미친 구조적 충격이었다. 즉, 복본위제의 폐지가 경제 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 은의 제거로 인한 통화량 감소가 당시 경제를 지탱하던 농민들의 부채를 가중시킨 것이 원인이었다.
루스벨트와 중국의 공산화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 침체에 직면해 있었다. 실업률이 25%를 넘어서고 농산물 가격은 급락했으며, 산업 생산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 위기 상황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양한 경기부양책을 추진했는데, 그중 하나가 1934년 시행된 은 매입 정책이었다. 루스벨트 정부는 국제 시장에서 은을 대량으로 매입함으로써 통화 공급을 늘리고 물가를 상승시키려 했다. 은 매입은 디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인플레이션을 유도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이었다. 그 결과, 미국 내 일반 물가는 약 14%, 도매 물가는 32%, 농업 생산물 가격은 79%까지 상승했다. 이는 미국 농민들의 소득 회복과 물가 안정에 일정한 효과를 가져왔으며, 본원통화 확대를 통한 경제 회복이라는 정책 목표에 부합했다.
그러나 미국의 은 매입 정책은 국제 금융 시장에 의도치 않은 충격을 초래했다. 당시 은을 통화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국가들, 특히 중국과 멕시코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중국은 20세기 초까지 은본위제를 유지하고 있던 거의 유일한 국가였다. 루스벨트의 정책으로 국제 은 가격이 상승하자, 중국 내 은은 빠르게 해외로 유출되었고, 국내 통화량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통화량 감소는 중국 경제에 디플레이션 압력을 가했고, 농산물 가격과 실질 임금 모두 하락했다. 농촌 경제는 타격을 받았고, 도시의 소비 여력도 함께 위축되었다. 당시 집권 중이던 국민당 정부는 이 경제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사회 전반에서 민심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정부는 은본위제를 포기하고 불환지폐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시 자금 조달을 위해 대규모 화폐 발행이 이어졌고, 지폐 발행량은 전쟁 초기 대비 300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물가의 연평균 150% 상승이라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화폐 가치의 급락은 실물경제 전반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통화 시스템의 붕괴는 정치적 신뢰 상실로 이어졌고, 이러한 혼란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이 국민당을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하는 기반 중 하나가 되었다. 루스벨트의 은 매입 정책은 본래 미국 내 디플레이션 극복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국제 금융 체계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특히 은본위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중국의 화폐 안정성을 무너뜨림으로써, 단일 국가의 통화정책이 타국의 경제와 정치 체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인플레이션의 원인
인플레이션은 화폐 공급이 실물 생산량보다 빠르게 증가할 때 발생한다. 즉, 화폐 발행이 인플레이션의 직접적 원인이며, 물가 상승은 그 결과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잘못 진단하고 엉뚱한 대상을 지목하곤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기업의 탐욕, 유가상승 등이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 점을 명확히 지적했다. 노동조합과 기업의 탐욕이 가격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생산성 증가를 초과하는 임금 인상은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1973년 석유파동 이후 5년간 일본과 독일의 인플레이션율이 하락한 반면, 미국만은 1979년까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동일한 외생적 충격(유가 급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 물가 흐름이 달랐다는 점은, 인플레이션의 주된 결정 요인이 화폐의 움직임임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화폐는 왜 과도하게 발행되는가? 프리드먼은 미국의 1960~70년대 사례를 분석하며 세 가지 원인을 제시했다. 첫째, 정부 지출의 급격한 증가, 둘째,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 셋째, 연방준비제도(Fed)의 비효율적 통화정책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정부는 지출 확대를 위해 조세나 민간 차입보다는 중앙은행을 통한 국채 매입을 선택했고, 이 과정에서 통화량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조세는 국민의 소비 여력을 줄이고 정치적 반발을 불러올 수 있으며, 민간에서의 자금 차입은 금리를 상승시켜 민간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 반면, 중앙은행의 국채 인수는 눈에 띄지 않게 정부 재정을 충당할 수 있으며, 동시에 통화량 증가를 통한 고용 확대와 경기 부양이라는 정치적 목적도 달성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정부는 반복적으로 화폐 발행에 의존하게 되며,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
결국 인플레이션은 단순한 시장 현상이 아니라,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 선택에 의해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또한, 인플레이션은 정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한다. 화폐가치가 하락하면 실질 채무 부담이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이라는 ‘보이지 않는 조세’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자원을 이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은 종종 의도된 재정정책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통화정책의 정치적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선택문제는 높은 실업을 높은 인플레이션의 결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인플레이션 처방의 일시적 부작용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화폐경제학』 본문 中
불황의 필연성
1861년부터 1957년까지의 영국 데이터를 분석한 윌리엄 필립스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반비례한다는 통계적 상관관계를 제시했다. 그의 이름을 딴 필립스 곡선은 일정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감수하더라도 실업률을 낮출 수 있다는 이론적 기대를 낳았고, 1960년대까지는 그 예측이 경제 현실에 들어맞는 듯했다. 이 곡선은 재정 확대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며 상황은 달라졌다. 오일쇼크를 계기로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동시에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이 되었다.
이 현상에 대해 밀턴 프리드먼은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잘못된 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성공적인 인플레이션 억제의 부작용이라 설명했다. 즉,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면 통화량 증가를 멈춰야 하며, 이는 단기적으로 실업과 경기 침체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인 현상이라면,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도 결국 통화정책일 수밖에 없다. 지급준비율을 인상하거나 양적완화를 중단하는 방식으로 통화량을 줄이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단기적 불황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치의 영역이다.
1970년대 미국 농민들이 워싱턴 D.C. 에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생계난을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 가격 인상을 요구했던 장면은 이중적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인플레이션은 채무자에게는 유리하고, 채권자에게는 불리하다. 자가주택 보유자는 실질 채무가 줄어드는 반면, 현금 보유자는 구매력이 하락한다. 계층에 따라 인플레이션에 대한 이해관계는 달라지며, 이는 정책적 조율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밀턴 프리드먼
통화정책: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
통화정책의 핵심은 화폐량의 공급 조절에 있다. 밀턴 프리드먼은 장기적인 물가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통화 증가율의 안정적 유지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나 중앙은행이 자의적으로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예측 가능하게 공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규칙 기반 접근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낮추고, 경제주체들이 합리적인 기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통화량의 급격한 확대나 축소는 언제나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역사적 경험은 이를 반복적으로 증명해 왔다. 통화 증가율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면, 물가 역시 장기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정치적 유인은 통화정책의 일관성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변수다. 정부는 경기 부양과 실업률 감소, 국채 상환 등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재정 적자가 확대된 상황에서는 조세나 국채 발행 대신, 중앙은행의 통화를 통한 간접적 자금 조달이 선택되기 쉽다. 이 경우 인플레이션은 마치 '보이지 않는 세금'처럼 기능한다. 국민의 실질소득을 깎지 않으면서 정부의 실질 부채를 줄이고, 명목 세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은 기술적 실수라기보다 정치적 선택의 결과로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 역시 정치적 압력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다는 점에서, 통화정책의 신뢰성은 언제나 위협받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정부가 구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원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떤 태도로 돈을 관리해야 할까? 인플레이션 시대에서 합리적인 자산 관리와 소비 습관은 무엇인지, 다음 장에서는 돈에 대해 갖는 개인의 심리를 돌아보고, 인플레이션 시대의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참고도서 : 화폐경제학, 지은이 : 밀턴 프리드먼, 출판: 한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