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박경리, 마음, 촛불혁명, GEO
2016년 겨울, 우리는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평화로운 시민의식, 정치권력의 교체, 모두가 “성공한 혁명”이라 불렀다. 하지만 정권은 바뀌었는데, 세상은 왜 그대로일까? 혐오와 분열은 왜 더 깊어졌을까?
우리는 정말 ‘무언가’를 바꿨는가?
촛불은 권력의 교체를 이뤘으나 세상의 틈새에 남은 어둠을 태우지 못했다. 혁명의 화염이 남긴 것은 새로움의 재(灰)였으며, 『장길산』은 이 재 속에서 반복되는 실패의 유전자를 해부하는 현미경이 된다.
『장길산』은 오래 전의 소설이지만, 우리 시대가 반복하는 혁명의 한계와 실패를 문학적으로 선취하고 있다. 문학이 예견한 혁명의 한계-감정의 분열, 존재의 고립, 제도의 공백-는 21세기 서울의 거울에 비친 우리 얼굴이다. 길산은 존재의 방식, 마음의 구조, 감정의 방향을 바꾸려 했으나 실패했다. 구조는 없었고, 공동체는 분열되었으며, 존재는 고립되었다.
이 책은 묻는다.
진짜 혁명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
제도 개혁에서? 감정의 분출에서?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존재 방식이다.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고, 어떻게 감정에 휘둘리며,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지—이 모든 감각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혁명은 반복되고 실패한다.
이 책은 『장길산』이라는 문학적 서사에서 출발하여, 역사 속 수많은 실패한 혁명들, 그리고 박경리의 시
마음 바르게 서면 세상이 다 보인다
라는 문장에서 도달한 철학적 중심을 추적한다.
※ 황석영, 국학과 민속학 집단 지성의 공동 창작물 『장길산』
황석영의 『장길산』은 1974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일보에 10년간 연재된 한국 문학사상 가장 장기적인 대하 연재소설 중 하나다. 당시 한국일보 사장은 연재를 조건으로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자료비를 선지급했고, 황석영은 그 자금으로 민중사와 민속문화, 각종 국학과 민속학 사료를 수집했다.
이로 인해 『장길산』은 1970년대 한국 국학과 민속학이 함께 창출한 집단 지성적 창작물로서, 단일 작가의 산문이라기보다는 민중의 구비문학과 제도 밖 기억의 복원에 가까운 실험으로 평가된다.
문체 또한 유례없이 독창적이다. 고어와 현대어, 방언, 토속어, 속어, 욕설, 그리고 구비문학적 언어가 압축적으로 공존하며, 이는 한국어라는 언어 자체가 가진 지층성과 억압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이기도 했다.
단순한 의적 서사를 넘어 『장길산』은 조선 후기 민중의 생존감각, 봉기와 배신의 감정 구조, 존재 윤리의 고립과 무너짐을 문학적으로 사유한 작품이며, 남북한 모두에서 발간된 유일한 소설 중 하나로서 통일문학의 상징이기도 하다.
혁명은 실패했으나, 그 실패를 가장 깊고 정직하게 기록한 텍스트로서 『장길산』은 여전히 살아 있다.
아래 시산의 글에서 위 일면목을 엿볼 수 있다.
※ 장길산 줄거리
황석영의 장편소설 『장길산』은 조선 효종 말기부터 숙종 연간에 이르는 신분 해체와 민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도망친 여비의 아들로 태어난 장길산은 출산 직후 어머니를 잃고, 구월산의 광대 장충에게 길러진다. 총명하고 정의감 넘치는 그는 역사 이갑송, 송상 박대근 등과 교류하며 성장하고, 기녀였다가 버려진 묘옥과 사랑에 빠진다.
간상배 신복동을 징벌하려다 사형수가 되지만 탈옥 후 금강산으로 도피하고, 스승 운부 대사의 가르침을 받아 복수를 넘어 백성을 위한 삶을 모색한다. 대기근 속에서 관아와 부호를 습격해 굶주린 민중을 구제하며 ‘도적’에서 ‘백성의 병졸’로 전환하는 존재 윤리를 실천한다.
길산은 언진산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구월산과 자비령을 중심으로 활빈도(의적단)를 조직해 전국적 연대를 도모한다. 그러나 내부 배신과 감정 분열, 구조적 설계 부재 속에서 혁명은 균열되고, 관군의 탄압으로 끝내 길산은 자취를 감춘다.
『장길산』은 단지 민중 봉기의 서사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환을 꿈꿨던 길산의 실패를 통해 ‘감정·구조·존재’ 세 축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혁명이 어떻게 고립되고 반복되는지를 문학적으로 선취한 작품이다.
이 글이 주장하는 G·E·O 분석틀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혁명의 반복과 윤리의 공백을 가장 근본적으로 설명해 준다.
•G (Governance): 제도적 구조 전환. 정권 교체, 헌법 개정, 권력체계의 변화 등 외형 질서의 재편. - 줄기
•E (Everyday Power): 일상 권력의 재편. 감정 구조, 언어, 규범, 미디어 담론 등 푸코가 말한 ‘미시 권력’까지 포함. - 흙
•O (Ontology): 존재 방식의 전환. 자기감정에 대한 통찰과 조율 능력, 자기 감응 능력, 윤리적 감정 구조의 형성.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 프롬의 ‘존재 중심 인간’, 박경리의 ‘바른 마음’ 개념이 이에 해당된다. - 뿌리
길산이 금강산에서 하산할 때, 스승 운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천대받는 백성들의
울분이 화한 ‘마음’이요,
그 ‘손발’이고,
그 ‘머리’며,
그 ‘무기’가 되어라.
- 장길산 5권, 창비, 2004, 272면
이 문장은 단지 한 스승의 조언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을 구성하는 네 겹의 층위를 드러내는 문학적 구조다.
- ‘마음’은 존재의 감응 능력으로 노자의 ‘존재의 본질’, 에리히 프롬의 ‘존재의 전환’, 레비나스의 ‘타자를 향한 관계의 자리’다.
- ‘손발’은 푸코가 말한 자기의 테크놀로지, 즉 윤리적 실천의 훈련된 기술이며,
- ‘머리’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 즉 인식 구조의 재편이고,
- ‘무기’는 순자가 말한 예(禮)로, 감정을 제도화하고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통치 장치다.
『장길산』은 문학을 통해 이 모든 층위를 한 인물 안에 통합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문학을 따라 혁명의 이론을 다시 구성하려 한다.
G·E·O 분석틀은 단순한 도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실패한 모든 혁명을 해석하는 열쇠이자,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철학적·정치적 조건이다.
(이 구조의 세부적인 내용과 근거가 되는 철학들은 추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혁명의 재(灰)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양분이다. 광장의 촛불이 남긴 재 속에서, 우리는 『장길산』이 가르치는 혁명을 배운다. 다음 혁명은 제도(G)의 가지를 뻗기 전, 존재(O)의 뿌리를 내리고 감정(E)의 흙을 비옥하게 할 때 비로소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문학이 예견한 실패의 유전자를 해독하는 일-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시작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질문이다:
지금 나는 어떤 존재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혁명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글을 탈고하고 예전 대금 선생님이 생각나 산책하며 선생님의 음악을 다시 들었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 것인지, 늙기는 늙었나 보다.
나중에 소설을 쓰고, 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꼭 이 곡을 주제곡으로 써달라고 제작자에게 이야기할 테다.)
[표지이미지: 이 이미지는 휘각(揮珏)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AI 도구를 사용하여 생성되었습니다. CC BY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