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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향(向)

너(2017) 봄#마지막

by 리그리지 전하율

그 호텔 욕실에는 꽤 너른 욕조가 있다. 평소 반신욕을 즐기는 나는 여행지에 가면 잠자리에 들기 전 늘 반신욕을 한다. 그 호텔에서도 반신욕을 했다. 꽤 오랫동안 천천히. 물이 식으면 식은 물의 온도를 잠깐 느끼다가 다시 뜨거운 물을 받았다. 몸에 한기가 들 때 즈음 다시 뜨거운(따뜻한 말고) 물이 몸에 적셔졌을 때의 쾌감은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손이 퉁퉁 불 때까지 오랫동안 욕조에 몸을 담그고 너를 떠올렸다. 너를 떠올리니 다시금 너의 묘한 향이 마치 실재라도 하는 듯 코 끝에 닿았다.

마음에 너의 눈빛 같은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뜨겁거나 차가운 바람이 아니었다.

내 마음에 분 바람은 그저 미지근한, 미지근해서 굳이 맞지 않을 필요를 찾지 못한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었다.

무채색의 너, 그리고 미지근한 바람. 그리고 난 그 묘함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이 밤의 시간을 조금 더 잡아두기로 한다.

그 어떤 것도 곁다리로 두지 않고 오직 너에 대한 생각을 했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온갖 애매한 생각에 지쳐 나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극심한 갈증에 눈을 떴을 때 난 내 생 최고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아니, 내 생 최고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해야 할까. 오전 여섯 시가 되기 조금 전의 이른 새벽이었다. 고층의 호텔에서 통창 너머로 내려다본 새벽의 광안리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마치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어느 세상에 오롯이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깊은 고요를 보았다.

무채색의 광안리. 모든 소음과 현상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유가 전부 걷히고 그저 바다만이 남았다.

소음이라고는 그 바다가 만들어내는 파도 소리, 그뿐이었다.

늘 느끼는 나의 불완전한 공허와도 같은 풍경이었다. 난 갈증도 잊은 채로 그 공허의 한가운데 서기 위해 호텔 밖으로 향했다. 단순히 내 느낌에 의존해 해수욕장의 가운데 즈음이라 느껴지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신발을 벗었다. 이른 봄의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음껏 느끼며 모래에 위에 발을 얹었다. 처음엔 그 감촉이 생각보다 차갑게 느껴져 움찔했지만 이내 모래의 온도에 적응한 나의 맨발은 모래의 차가움보다 모래의 부드러움에 집중했다.

그 새벽은 완벽했다. 그래서 해가 천천히 뜨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서 생각했지.

난 왜 늘, 지금이 영원에 갇히길 바라는 걸까.

맨발로 모래사장을 거닐며 해가 뜨기 직전의 서늘함을 즐겼다.

그리고, 바다의 짠 내음 사이로 그 향이 느껴졌다. 기척보다 향으로 먼저 너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향이 먼저였고 그다음이 너의 존재였다. 나는 모래 위 나의 맨발에 고정했던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옮겼다. 정말 네가 있었다. 너는 여전히 무채색이었고 미지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너에게 궁금한 것이 없었다. 어떤 질문이라도 던지는 순간 네가 홀연히 사라질 것 같았다.

그날의 넌 위태로운 듯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첫눈에 반했다거나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 따위의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너의 위태로운 아름다움에 그저 내 마음의 파도가 일렁였고 그 감정은 참으로 묘했다. 너에 대해 무언가를 더 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가 불완전한 공허를 완벽하게 느끼는 이 순간 내게 영감을 주었던 존재로 마음속 깊은 곳에 조용히 숨겨두고 싶었다.

나는 말없이 계속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너는 나만큼이나 특이했다. 너 역시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너도 말없이 나를 따라 모래사장을 걸었지만 너는 끝내 검정 로퍼를 벗지 않았고 끝내 내게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렇다고 넌 내가 먼저 네게 말을 걸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너는 단지 이른 오전의 사색을 즐기며 그 사색의 순간에 아무 말 없이 또 다른 사색에 잠긴 ‘나’를 원했다. 우리의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너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스친 수많은 타인 중 가장 특별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나를 제외하고 너와 같은 유형의 인간을 처음 보았다. 그 말에 어쩌면 의미 없을 각주를 붙이자면 너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느꼈다. 나는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사실 내가 이 시간에 이 모래사장을 거닐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갈증이었다. 갈증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조금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목이 탔다. 나는 흙이 잔뜩 묻은 발을 대충 신발에 구겨 넣고 잠깐 너를 봤다. 내 나름의 작별 인사였다. 너는 가만히 서서 신발을 신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나를 등지고 우리가 걸어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나는 조금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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