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살'연재중입니다._"그 때, R이 뒤돌아섰고, 눈이 마주쳤다"
출근하자마자, 어제의 연장선처럼 회의와 보고가 이어졌고, 오전 회의를 마친 뒤, 김전무와 함께 골프장으로 향했다. 거래처와의 라운딩, 격식과 허세가 적절하게 점목된 접대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나이스 버디"
"오늘은 안되겠는데요?"
내가 만원짜리 몇장을 세어 염본부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러게 오늘 좀 잘되네.. 맨날 정대표에게 발리다가 오늘 좀 되는데?"
"에이 무슨 말씀을... 제가 본부장님께 조공한 걸로 골프채도 열번을 더 바꿔드렸을 껄요?"
둘은 마주보여 웃었다.
"그러게요 오늘은 안되겠는데요?"
김전무님도 만원짜리 몇장을 건네며 거들었다.
"괜히 전 뭡니까? 실력도 안되는데 따라와서 도식락만 하고 있으니..."
이 팀장의 볼멘소리도 감정이 상해서 나온 말이 아님을 알기에 넷은 마주보면 웃었다.
"자 그럼 그늘집에서 막걸리 한잔 하고 후반전 가시지요"
이 팀장의 말에 나도 너스레를 떨며 거들었다.
"후반전에는 막걸리 샷을 보여 드릴껍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넷은 홀을 빠져나와 카트를 행해 걸었다.
막걸리 한잔을 시원하게 비워내고, 머릿고기 한점을 집어들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순대, 머릿고기 몇점이 35,000원, 막걸리가 15,000원... 폭리도 이런 폭리가 없는 골프장이지만, 고급스포츠라는 인식이어서 그런지 품위를 지키려는 건지 아무도 불만을 얘기 하지 않는다. 그게 문제다. 분명 잘못 된건 알지만 체면이라는 무게에 눌려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박 대표는 영전하신 겁니까?"
"그러게 갑자기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정식 인사 이동 기간도 아니었는데..."
"그러게요. 골방에 있던 박대표가 영전을 알 줄이야. 이대표가 그렇게 무시를 하더라니, 오히려 자신이 팽당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이대표는 못버틸꺼야"
우리의 화두는 얼마전 L건설사의 특별 인사이동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와신상담이라고 했던가? 누가봐도 골방 늙은이로 끝날 줄 알았던 박대표가 컴백 할 줄이야. 얼마나 칼을 갈았을까?
난 김전무님을 바라보며 눈빛을 건냈다. 김전무님은 미세하게 끄덕였고, 내일이면 가장 비싼 '난'이 박대표 책상에 배달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번 용인 PT는 준비 잘하고 있나?"
염본부장이 막걸리 잔을 들며 나에게 물었다.
나도 덩달아 막걸리 잔을 들자 김전무님과 이팀장도 잔을 올렸다.
용인 프로젝트는 내일 모레 사전 미팅이 있는 D사 PT를 말하는 것이었다. 기다리던 물음이 나왔지만, 너무 서둘면 티가나기에 난 막걸리 한잔을 다 비워내고야 말을 했다.
"저희는 늘 열심히 준비하지요~ 봐주시는 분들이 잘 봐주셔야되는 거라..하하"
너무 비굴하지도, 너무 티내지도 않는 아부
"그렇지. 이팀장 정대표한테 PT핵심 포인트 잘 전달해줘"
염본부장이 이팀장을 향해 말을 건내자 이팀장이 말했다.
"에이 정대표님네는 늘 잘하시는데 무슨~"
'정대표 나도 있어' 라는 안묵적인 압박이 작용하는 순간
"에이 이팀장님이 도와 주셔야 저도 살지요"
'알았어 챙겨줄께'
서로 잔을 부딪히며 오가는 눈빛엔 서로의 뒷말이 숨어 있었다.
"10시 32분. 염프로님 일행분 이동 하실께요"
마침 캐디의 호출에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염본부장은 화장실에 들린다며 화장실로 향하고, 김전무님은 리필을 부탁한 커피를 가지러 자리르 이동했다.
"아이고 이팀장님 좀 도와주십시요. 제가 이팀장님 밖에 더 있습니까?"
"왜 그러세요 정대표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대우를 해주는 어투가 실지는 않았는지 약간의 취기에 밝은 기분좋은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월요일에 전화 드릴께요"
이팀장의 확답을 받고서야 난 안심이 되었다. 어차피 염본부장하고 결정난 일이지만, 그래도 이팀장의 체면도 세워줘야 하는 것이니. '와신상담' 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않는가?
푸른 잔디가 눈에 들어오고, 카트를 향해 걸어가는 바람 사이로 M의 향기가 뭍어왔다. 아무리 보아도 M은 없는데 만약 골프장에서 오가며 스쳐 지났다면 누구보다 먼저 내가 알아봤을 것이다. 그 잔향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Time -1
그리 대단한 곳은 아니지만 신림동에서는 제법 가격대가 있는 독립된 방이 있는 주점에서는 무슨 노래인지는 알지만 따라 부를 수 없는 팝송들이 흘러 나왔다. 'New Kids On The Block', 'Tommy Page'
어느 정도 취기도 오른 상태이기에 첫 만남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오가는 대화에는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긴... 그냥 냅다 뛰었지..."
D의 대답에 맑은 웃음소리가 다시 공기를 채웠다.
난 작은 미소와 함께 소주잔을 입에 갔다가 대었다.
Y가 말을 이었다.
"와 그때는 정말 너무 놀라서 뒤도 안돌아 봤다니까"
예전에 영등포에서 술을 마시다가 호기로 붙은 조폭준비생들과의 패싸움에서 냅다 도망쳤던 비굴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이 미팅의 주선자격인 J와 H 그리고 R이 나왔고, 우리는 나와 Y,D가 나와 3:3 미팅의 구도가 성립되었다. 암묵적으로 J와 나는 커플이 확정이었고, H와 R, 내 친구들인 Y와 D만 결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분위기는 좋았기에 서로 맘에 안들 경우는 극히 적었지만, 적어도 분위기상 한명이 이뤄지지 않는 다는 것은 생각조차 들지 안았다. 또한 상대방도 절친들만 나온 자리 인듯했고, 우리도 절친들만 나온 자리니 의리를 위해서라고 억지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나저나 넌 왜 이렇게 말이 없냐?”
Y가 내게 물었다. 원래 분위기 메이커였던 내가 말이 없자, 그도 의아했던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장난스레 대답했다.
“뭐래? 술이나 드셔, 병신아~”
어색할 수 있었던 분위기는 가볍게 웃음으로 넘겼다. 다행히 J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너희는 좋아하는 가수 있어?”
“난 서태지와 아이들이 좋아.”
서태지와 아이들. 음악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왠만하면 80점 이상은 준다는 점수에서 79점인가 밖에 주지 않으며, 혹평을 쏟아 냈지만, 새로운 음악을 갈구하던 X세대에겐 정말이지 문화적 혁명을 일으킨 말 그대로 '문화 대통령'의 탄생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그 이름만으로도 당시의 청춘은 설명이 가능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싫어 하는 사람이 어딨냐?"
D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서태지"
J는 자신이 서태지와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표현하였다.
"이제 얼추 마셨으니, 노래방갈까?"
내가 장소이동을 제안 하자 모두 동의의 표현을 보냈다.
상대방 3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다녀올께" 라며 자리를 비웠다.
왜 여자들은 화장실을 같이 가는지 이해는 안되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의견을 조율한 비밀공간이 필요했는지는 모르겠다.
"너 왜그래? 무슨 않좋은 일 있어?"
Y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은..."
"근데 너 답지 않게 왜그래?"
"무슨 일은..그냥 오늘은 좀 그런 날이야"
난 술잔에 술을 비워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삐삐가 울렸다.
"아씨 집이네...여기요 계산할께요~"
난 손을 들어 주인 아저씨를 불렀다. 고등학생인지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 신림동은 대부분의 술집이 고등학생 대상으로 장사를 유지하고 있었고, 인근 경찰서에서도 일정 금액을 상납받는 것으로 형식적인 단속만 이어갔을 뿐이다. 언제나 그렇듯 D는 만원짜리 한장을 건네고, 나머지는 나와 Y가 금액에 맞춰 계산을 마무리했다. 밖으로 나오자 여름을 제촉하는 봄날의 바람이 주위를 스쳐지났고, 마치 자매처럼 팔짱을 끼고 나온 그녀들은 맑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 봤다.
R이 말했다.
"여기 많이 나왔을 텐데... 노래방은 우리가 낼께~ 어디로 가면 돼?"
"그래? 그럼 따라와"
D는 Y와 함께 앞장서자 세자매(?)는 팔짱은 풀지 않으채 총총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난 마지막에 담배 하나를 꺼내물고, 천천히 걸었다.
토요일 밤에 신림동은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로 가득찾고, 그중에 아는 사람 몇몇이 눈에 띄었다. 다행이도 서로를 부둥켜 않고 친한척은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 가벼운 눈인사로 아는채 말은채 하며 지나갔다. 친한 녀석들이라도 만나면 월요일 아침부터 세자매에 대한 물음으로 귀찮아 질테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D와 Y가 골목을 돌아 2층에 노래바방 불이 켜져 있는 입구에서 나를 보며 손짓을 해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건물을 향해 걸어 갔다.
그 때, R이 뒤돌아섰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