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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자살 07화

자살6

소설 '자살'연재중입니다. _"어? 너 어디야 빨리 안와!"

by Kunucando

"그래서 요즘은 어떠냐?"

곱창 한 점을 집어 들며 내가 물었다.

"어떠긴, 그냥 좋다."

기운이는 소주를 단숨에 털어 넣고는

"캬—" 하고 알코올 기운을 내뱉었다.

"야, 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대책도 없이 뭐냐? 좀 더 버티다가 명퇴하고 퇴직금이나 실컷 받지."

"고마해라. 다 똑같은 말이다. 너라도 좀 안 하면 안 되냐?"

나는 웃으며 기운이 잔에 소주를 따라줬다.

"알았다. 알았어. 잘 나가던 놈이 갑자기 그러니까, 안타까워서 그런 거지."

기운이는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친구다. 같은 동네 출신이지만 학교를 함께 다니진 않았다. 우연히 중학교 동창을 통해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근거리에서 부담 없이 한잔 할 수 있는 사이. 무엇보다도 서로의 삶의 영역을 존중해주는 우정. 그것이 우리 관계의 핵심이었다.

기운이는 우리나라 빅5 안에 드는 대기업의 연구직이었다. 그가 아무런 계획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는, 친구로서가 아니어도 누구라도 한마디쯤 하고 싶을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제 뭐 하려는 건데?"

"글쎄, 아직은 생각 없어. 그냥 일단 사무실 하나 얻어보려고."

"이제 대표 되는 거야?"

"대표는 무슨. 아이템도 없는데."

소주잔이 부딪히는 공허한 '짠' 소리가 우리 사이를 메웠다.

곱창 한 점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고생했다."

소주병을 흔들며 외쳤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일찍 왔네."

아내가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애들은?"

"딸은 학원 갔고, 아들은 자."

"왠일로 일찍 대?"

"유치원에서 체육 활동 했나 봐. 낮잠도 안 잤고. 밥은?"

"괜찮아."

아내는 다시 시선을 TV로 돌렸다.

"기운이가 회사를 그만뒀대."

"기운 씨가 왜?"

"몰라, 그런 건 잘 안 물어보잖아. 힘들었나 보지."

"그래도 아깝다. 연봉도 높고 좋은 회사였잖아. 하긴, 결혼도 안 했으니 부담은 덜하겠지."

그럴 수도 있다. 미혼이기에 가능한 선택일지도. 하지만 그의 속사정은 우리가 알 길이 없다. 오죽하면 그만뒀을까—그 생각에 마음이 짠해졌다.

"씻을게."

"응, 씻고 쉬어."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문득 M의 향기가 스쳤다.

걸음을 멈추었다.

TV 속 웃음소리에 맞춰 아내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욕실을 향해 걸었다.



Time -1


"아 드디어 끝났다"

내가 기지개를 펴며 허리를 있는 힘껏 뒤로 재쳤다.

"끝나긴 이제 시작인데"

Y가 시험지를 접으며 말했다.

"하긴 이제 고3을 향해 가는구나"

D가 우리 자리로 건너오며 말했다.

"기말도 끝났는데 오늘 뭐하냐? 쏘주나 한잔 빨까?"

"난 R 만나기로"

Y가 말했다.

"그래? 우리도 가면 안되냐?"

D가 장난 스럽게 말했다. 나도 은근히 힘을 실어주고 싶었지만, 침묵대신 Y의 얼굴을 흘낏쳐다 봤다.

"싫어 둘이 만날꺼야"

Y가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이따 심심하면 삐삐쳐!"

남자 둘이 술마시는게 못내 아쉬운지 교실문은 나가는 Y의 뒷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세자매들과 함께 몇번을 만나고, 각자의 데이트도 몇 번을 하였지만 결국 Y와 R을 제외하고는 헤어지고 말았다. 후일 알게 된 얘기지만 엇갈린 인연들의 만남에 그나마 좋은 추억을 남겼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 이었다.


신림동 어느 술집에 비교적 북적거리는 자리에 나와 D가 우연히 만난 같은 반 녀석들과 합석하게 되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넌 무슨과를 갈껀데?"

"무슨과는 지랄. 대학이면 다 가야지? 우리가 골라 갈 실력이 되겠냐?"

친구들의 대화에 모두가 긍적의 끄덕임을 보였다.

"무슨 대학이 별거냐? 안나와도 성공 할 수 있어"

"미췬 자신 없는 애들이 그런애기 하지, 대학은 가면 좋지"

"야~ 야~ 아직 일년이나 남았는데 무슨 소리야? 일년 빡시게 해서 좋은 대학 가면 되지"

기말고사가 끝난 현실의 해방감일까? 고3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대한 각오일까? 생전 화두가 되지 못한 '대학'이 우리의 술상 위로 올라 왔다.

"4778 호출하신분!"

시끄러운 음악사이로 마이크 방송이 나오고

D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향해 갔다.

나는 술상위에 올라온 '대학'의 술안주에 나름의 진지함으로 대화에 참여를 했다.

D가 나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고 말했다.

"가자"

난 새우깡을 반쯤 입에 넣고 D를 쳐다 봤다. D가 따로 자리를 만들만한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만난 친구들을 버리고 다른 자리로 이동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Y가 R이랑 술마시는데 오래"

"거기를 우리가 왜가?"

나의 입은 나의 마음과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너 안가? 그럼 나만 간다"

한번만 더 물어봐주기를 바랬지만, D는 옷을 걸쳐입고서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향해 갔다.

왠지 봐서 안될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취기가 올라 올때는 더욱...

'눈 오는 날이던가 벤치에 홀로 앉아 그녀를 기다리다 친구의 친구를 만났네 동그랗게 큰 눈이 예쁘게 보이지만 친구의 친구기에 사랑할 수 없었네~ 널 갔고 싶다고 말을 해볼까 차라리 눈감고 뒤돌아 서서 고백해 볼까?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끝날 줄 모른는 다가오지도 않은 '대학'의 명제가 술병만 잡아 먹고 있을 때쯤

연속해서 삐삐가 울렸다.

'0703'

'못보던 번혼데 누구지?'

올라오는 취기도 깰겸 답답한 지하도 벗어날겸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를 향했다.

마침 앞 사람이 통화를 끝내고 난 전화번호를 눌렀다.

"0403 호출하신 분요"

상대방에서

'0403번 호출하신분이요'라는 목소리가 울렸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야 R"

"어...?"

"어? 너 어디야 빨리 안와!"

"어?"

난 이상황이 어떤건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R의 목소리는 확신에 찬 통보를 날렸다.

"여기 우리 처음 미팅한데 YM 알지? 빨리와 안오면 죽어"

"어 근데..거기 Y랑 D는?"

"빨리와 끊어~"

R은 자신의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끝었다.

난 Y에게 삐삐를 남기고 다시 자리로 들어갔다.


어느정도가 흘렀음에도 호츨한 Y의 답은 오지 않자 슬슬신경이 쓰이기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만원짜리 두장을 건내고 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자 몇몇은 볼멘소리로 원망을 하다가 새로이 올라온 '스타크래프트' 얘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난 서둘러 계단을 올라 빠른 걸음으로 술집을 행해 걸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늘 드렇듯 알고는 있지만 따라 부를 수 없는 팝송이 흘러 나왔다.

'Richard Max _ Right Here Waiting'

각각의 방에선 낯선이들의 얘기사이로 유난히 조용한 방에 살며시 문을 열자 R이 벌개진 얼굴로 한쪽 팔로 얼굴을 괴고 술잔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를 보면 환하게 웃으며

"왔어? 안오는줄 알았는데"

난 맞은 편에 털썩 앉아 아르바이트를 불렀다.

"여기요, 잔 하나랑 수저 좀 주세요"

이리저리 휘집어져 있는 골뱅이 무침과 소세지 야채 볶음이 술상을 채우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생이 술잔과 수저를 건재주고 돌아서는 뒷 모습에 인사를 남겨두었다.

"감사합니다"

내 잔에 술을 따르고 말없이 한잔을 들이켰다.

젓가락을 집에 이미 식어버린 당근 한점을 입에 넣고 R을 바라봤다.

완전히 취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멀쩡한 것도 아닌 외줄에 선 정신이 나에게 까지 전달이 되었다.

"오랫만이다"

R이 먼져 입을 열었다.

"Y랑 D는?"

"갔어"

"응? 왜?"

"그냥 갔어"

R이 반쯤 남은 소주를 넘겼다.

그리고 물은 한 모금 마셨다.

난 말없이 R의 자네 반쯤 소주를 따라 주었다.

어색한 침묵은 노래가 채워주었다.

"잘 지냈냐?"

이 번엔 내가 먼져 물었다.

"응. 뭐 그렇지"

"그나저나 Y랑 D는 어디 간거야"

"Y랑 싸우고, Y가 화내서 D가 데리고 갔어"

"왜 싸웠는데?"

R은 대답대신 소주잔을 들었다. 그리고 물은 한 모금 마시고...

"안주 좀 먹어라, 물이 안주냐?"

"난 물이면 돼"

"내 삐삐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

"그냥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처음 부터 어떻게?"

"그냥 처음 부터..."


나란히 걷기는 하지만 약 반 반자국 뒤에서 난 R을 따라 걸었다.

R의 집을 알지는 못했지만 거의 다 왔다는 것을 느낌으로 일고 있었다. 우리는 형식적인 몇마디를 제외하고는 별 말이 없었다.

R의 집앞에 도착하자 R이 내게 물었다.

"가끔 삐삐해도 돼?"

"그래라. 맨 정신에"

R도 웃고, 나도 웃었다.

"갈께. 여기 2층이 우리집"

"그래"

"간다"

R은 뒤돌아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약간의 흔들림은 있었지만,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1층 계단에 불이꺼지자, 바로 2층게단의 불이 켜졌다. 창문 사이로 R의 불안한 그림자가 벨소리와 문열리는 틈으로 사라졌다. 난 담배 한대를 물고, 왔던 길을 따라 걸었다. 처음 와본 길임에도 어딘가 익숙함을 느끼며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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