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날레 | 밥상머리 교탁에서 피어난 마지막 카덴차

그리고 영원한 배움의 심포니

by 소나타 그레이스

열두 해 봄, 초등학교 졸업을 코앞에 둔 진해의 거리는 온통 흐드러진 벚꽃 심포니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근무하시던 아버지의 단단한 리듬에 맞춰,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벚꽃 축제의 피날레가 끝나자마자, 어린 저는 인생의 새로운 독주(獨奏)를 위해 낯선 도시 서울, 외할머니 댁으로 홀로 떠나야 했습니다. 중학교 배정을 위한 불가피한 이동은 군인 가족의 숙명이자, 제게는 현기증 나는 불안한 떨림으로 다가오는 갑작스러운 조바꿈(調變)이었습니다.



봄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5월,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맞이한 서울 초등학교 전학 생활은 마치 갑작스레 조율이 바뀐 악기처럼 모든 것이 어색하고 삐걱거렸습니다. 정겹고 부드럽던 경상도 사투리의 멜로디는 사라지고, 낯설고 딱딱한 서울 표준어의 박자만이 귓가를 어지럽혔습니다.

외할머니는 봄볕처럼 따뜻하셨고, 그분의 넓고 포근한 보살핌과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 덕분에 예민했던 사춘기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작은 만화 가게를 운영하셨고, 저는 텅 빈 집을 지키며 자개로 곱게 장식된 검은색 밥상을 유일한 벗 삼아 지냈습니다. 그 밥상을 교탁처럼 세우고 낡은 책들을 펼쳐 ‘선생님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때로는 방문짝에 분필로 설명을 써 내려가며 혼자만의 열띤 강의를 펼치기도 했죠. 놀랍게도 이 놀이 덕분에 학교 성적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습니다. 이 기상천외한 '원맨쇼'는 불안정하고 낯선 환경 속에서 어린 제가 스스로를 다독이고 꿋꿋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준 저만의 독특한 시그니처 학습법이자, 세상의 모든 불안으로부터 저를 지켜주던 가장 든든한 방어기제였습니다.

어쩌면 그 어린 나이에, 저는 이미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주요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낡은 밥상머리 교탁이 바로 제 꿈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장래희망란에는 늘 ‘교사’라고 적었습니다. 절실한 소명감보다는 그저 익숙한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제 삶은 유치원 선생님부터 지금의 한국어 선생님까지, ‘선생님’이라는 하나의 멜로디로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하늘이 제 안에 심어주신 특별한 소명의 씨앗이 아니었을까요.



고등학교 2학년, 아버지께서 서울로 발령받으시면서 흩어졌던 우리 가족 합창단은 다시 모여 따뜻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아버지의 오래된 책상을 물려받아 잠시 ‘내 책상’을 갖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대학 입시의 고배를 마신 후, 저는 출판사와 무역회사라는 전혀 다른 장르의 무대 위에서 방황하며 예상치 못한 경험들을 쌓았습니다. 낯선 일본어에 매료되어 밤낮없이 탐닉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년간의 고독했던 도서관 독주회 끝에, 유아교육과라는 새로운 무대에 당당히 올라섰고, 졸업 후 유치원에서는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매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합창곡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결혼이라는 감미로운 듀엣을 시작하고, 방송통신대학 편입이라는 새로운 악장을 연주했지만, 여전히 제 이름으로 된 온전한 연주대는 없었습니다. 부엌의 한구석, 임시로 마련된 무대에서 공부를 이어가는 동안, 남편의 책상은 늘 그만의 화려한 솔로 무대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들과 단둘이 살게 되었을 때는 넉넉한 6인용 식탁이 우리의 소박한 공유 무대가 되어주었지만, 그 공간의 진정한 주인공은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운 저의 아들이었습니다.

태국에서의 귀국 후 서울의 좁디좁은 임대주택으로 고단한 인생 투어를 이어가는 동안에도, 저만의 온전한 공간이 부재하다는 슬픈 발라드는 지겹도록 반복되었습니다. 산더미 같은 한국어 수업 준비와 석사 논문 작업은 언제나 식탁이라는 '만능 무대' 위에서 고독하게 펼쳐졌습니다. 소중한 책들과 논문 자료들은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황급히 양옆으로 밀려나 차곡차곡 쌓여야만 하는 신세였습니다.



이제, 제 인생의 가장 감동적인 앙코르 공연을 준비하며, 아주 오랜 꿈 하나가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뜨겁고 간절한 앙상블로 울려 퍼집니다.

바로, 온전히 저만의 책상을 갖고 싶다는 소망입니다. 오랜 세월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풍스러운 갈색 앤티크 책상. 그것은 마치 깊고 풍부한 울림을 가진 빈티지 바이올린처럼, 제 영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저를 간절히 부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좁고 불편한 공간은 이제 그만! 저는 제 삶의 모든 이야기와 지혜를 마음껏 펼쳐낼 수 있는 넓고 당당한 저만의 무대를 간절히 갈망합니다. 책상 없이 흘러간 수많은 세월에 대한 벅찬 보상이자 앙코르처럼, 이제는 오롯이 저만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삶의 지혜를 나누며, 영혼이 이끄는 대로 황홀한 즉흥 연주를 펼칠 수 있는 아름다운 꿈을 꿉니다.



배움에는 결코 마지막 음표란 없습니다. 마지막 선율이 사라진 후에도 그 깊고 아름다운 울림이 오랫동안 지속되듯, 세상을 향한 저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가슴 뜨거운 열정은 앞으로도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설렘과 감사로 가득한 마음으로, 제 꿈의 악보를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내려갑니다.

그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는 갈색 앤티크 책상 위에서 펼쳐질 제 인생의 마지막 장, 가장 웅장하고 찬란한 심포니를 향해, 한 음 한 음 소중히,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록하며….

이 아름다운 배움의 여정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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