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뒤에 찾아낸 나만의 리듬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의 강물 속에서, 저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관현악단의 지휘봉을 정신없이 휘두르며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반백 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넘도록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숨 고르기'의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가만히 음미해 봅니다. 그동안 제 인생의 악보에는 단 한순간의 쉼표도 허락되지 않은 듯 빼곡하게 음표들이 채워졌습니다.
진저리가 날 만큼 힘겨웠던 학습지 교사 악장을 마무리 짓고, 제 삶의 찬란한 전환점이 되어준 한국어 교사로 살아온 지도 어느덧 10년이 흘렀습니다.
문득, 앞으로 얼마나 더 이 강단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피어오릅니다. 박사 학위 소지자가 흔한 현실, 그리고 이미 50대 중반에 들어선 제게 '박사'라는 이름은 아득히 먼 꿈처럼 느껴집니다.
"박사 논문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고, 설령 교수가 된다 해도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라는 교수님의 현실적인 조언이 묵직한 저음처럼 가슴을 맴돌았습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30대에 한국어 교사의 길을 시작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을까, 잠시 부질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지만 이내 고개를 젓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저만의 속도와 독특한 리듬으로 꿈을 향해 나아갔고, 마침내 하나씩 그 꿈들을 눈부신 현실로 만들어왔으니까요. 격정적이었던 30대에는 피아니스트로서 열정적인 듀오 무대에 섰고, 찬란했던 40대에는 세종학당 파견 교원으로 태국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유아교육과를 시작으로 음악과, 피아노교수학과, 한국어교육과, 그리고 한국문화·문학학과에 이르기까지,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끝없이 배우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이버대학 일본어과에서 '학생'으로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습니다. 배움은 제 삶의 꺼지지 않는 희열이자 가장 든든한 동력이었습니다. 마치 한 곡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전조(轉調)처럼, 저는 단 한 번도 두려움 없이 새로운 도전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갔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재능은 마치 제 안에 오래전부터 숨겨져 있던 절대음감처럼, 자연스럽게 제 삶 속에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이웃 아주머니의 아들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던 순간부터, 교회 주일학교에서 동생들의 성경 암송을 돕던 순간까지, 제 안에는 작은 지휘봉이 숨겨져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는 군 작전처럼 학습 계획을 세웠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서 지켜보았습니다. 피아노 강사, 학원 강사, 학습지 교사로 바쁘게 일하며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지만, 아들은 제가 채워주지 못한 빈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아름다운 리듬을 찾아 스스로를 멋지게 가꾸는 법을 터득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악보 위에서 서로를 응원하며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이제 쉰다섯이라는 나이테를 새긴 지금, 저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려 합니다. 제 인생의 가슴 뛰는 두 번째 터닝포인트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지고 향기로워지며 성숙해질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처럼, 인생의 마지막 소절에 이르기까지 제가 쌓아온 지혜와 경험을 담아, 세상을 향해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제 안에서 강렬하게 타오릅니다. 그 글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해야만 하는 것'들의 무게를 내려놓고, '정말로 해보고 싶던 것'들을 용기 내어 실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분주하다는 핑계로 멀리했던 독서의 즐거움에 다시 푹 빠졌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필라테스도 어느덧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창문 가득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일정을 계획하면서 부푼 기대와 꿈을 안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글을 쓰는 이 새로운 행위가 제 인생의 악보 위에서 또 어떤 눈부시고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제 저는 단순히 주어진 악보를 연주하는 연주자를 넘어, 저만의 독창적이고 개성 넘치는 멜로디와 풍성한 화음을 만들어 세상에 들려주는 진정한 작곡가가 되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할,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카덴차(cadenza)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기록이 삶이 되고, 삶이 다시 아름다운 기록으로 피어나는 이 기적 같은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다음 편에서는 제 꿈의 아주 오래된 시작점, 그 특별했던 '교탁'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