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 11년 간의 시집살이
나의 시집살이의 시작은 서울에서 시부모님과의 상견례 자리에서부터였다.
처음 뵙게 된 시아버님께서 결혼하면 같이 살자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거절을 한다는 것은 당시 분위기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내 눈에 처음 뵌 아버님과 어머님의 모습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님은 매번 아버님이 음식을 드시고 나서야 드시기 시작하셨고 아버님 소매가 반찬에 닿을 것 같으면 어머니가 대신 아버님 소매를 잡고 계셨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자란 나의 친정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지금도 내 기억에는 어머니가 아버님께는 매우 순종적이셨고 항상 아버님 위주로 생활하셨던 기억이 있다.
특히 내가 결혼할 당시 아버님은 태국 한인회에서 부회장을 맡고 계셔서 나와 남편은 종종 한인회 행사에 참여를 해야만 했다. 물론 그때는 신혼이기도 했고 아직 아이가 없어서 육체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지만 신혼에만 느낄 수 있는 달달함이나 자유로움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남편도 막상 방콕이라는 홈 그라운드에 오니 더더욱 그냥 원래 살았던 대로 살게 되었고 나는 마치 남편의 여동생 마냥 아버님, 어머님이 살던 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다.
남편이 일하고 있을 때 나는 주로 어머님과 시간을 보냈다. 같이 운동도 다니고 미용실에 머리도 하러 가고 피부 마사지샵에서 마사지도 같이 하러 다녔다. 어머니는 친구 같은 며느리를 원하셨고 시누이가 떠난 그 자리는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비서 일이 싫어서 머나먼 태국까지 날아왔건만 결국엔 이렇게 월급 없는 어머니의 비서가 되었다.
나는 요리 하나 못하는 상태로 결혼해서 모든 살림을 어머니한테 배우다 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딪힘에 연속이었다.(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어머니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가르치는 게 참 답답하셨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우리는 집 1층에 사무실(아버님과 남편, 직원들이 일하는)이 있어서 아버님이 계실 때는 점심도 준비해야 했기에 1일 3끼를 준비해야 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요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어느 정도 가르치시고 나서는 3끼 식사준비는 나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아침 준비가 끝나고 식사 후에는 어느새 점심 준비를 해야 했고 점심이 지나면 다시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아버님이 점심이나 저녁 약속이 있으시면 그때가 내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방일이 서툴러서 거의 하루종일 부엌에 서 있었던 기억밖에 없다.
그때는 왜 그리도 요리가 힘들었던지.... 새색시면 누구나 느끼는 고민이겠지만 요리에 요 자도 모르는 내겐 끝이 없는 고통의 시작이었다.
한 번은 UFM이라는 제빵학원을 다녔었는데 과정을 다 마친후에는 수료증도 나오고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올 때마다 만든 빵을 들고 오면 아버님, 어머님, 남편이 매우 좋아하면서 같이 빵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요리나 제빵에는 소질이 영 없는지 지금 내가 기억하는 건 빵을 다 만든 후 포장할 때 고무줄로 빵이 든 비닐봉지를 공기를 채워 이쁘게 묶는 방법만 기억나고 그나마 어머니께 배운 요리로 아이들에게 인정받은 건 깐풍기, 탕수육, 된장찌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양한 일들과 많은 추억들이 있었고 아무래도 어른들과 함께 살다 보니 불편하고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남편과의 갈등이 가장 컸었던 거 같다.
왜냐하면 남편과 1995년 10월 26일에 만나 다음 해인 1996년 4월 6일에 결혼을 해서 채 6개월도 안된 기간에 짧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다 보니 너무나도 서로에 대해서 모르고 결혼을 한 것 같았다.
남편은 한국말을 하는 태국인이었고 게다가 항상 어른들이 계시니 우리는 큰소리를 내서 싸울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어느 때는 남편보다 아버님이나 어머님 하고 생각이 더 잘 맞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남편과의 문화 차이이기도 했고 국제학교를 나와서 일반적인 한국에서 자란 남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거의 3년 정도는 서로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맞추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편안한 중년을 맞이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서로를 많이 이해하고 배려하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들이 필요하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딸 1명과 아들 2명을 낳고 전 씨 집안의 아내면서 며느리로서 살아오게 되었고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새 내가 결혼할 당시의 어머니 나이가 되어 이제는 어머님의 마음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결혼 29년 차…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친정어머니의 죽음, 시아버님의 죽음, 아이들의 한국 대학입학,
그리고 3년 전 친정아버지의 죽음…
이젠 50대인 나에겐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이 모든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성장시켰다.
앞으로 좀 더 여유로운 인생 2막을 제대로 시작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