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딸의 탄생

by sommeil



1998년 6월 어느 날 첫째인 딸이 태어났다.


아버님, 어머님, 남편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의 가족에서 + 1 이 되는 순간이었다.

딸의 탄생은 우리 식구 모두의 관심이 되었고 기쁨의 순간이었다.

아버님을 비롯해 어머님, 남편, 나 이렇게 우리 모두는 첫째의 탄생을 매우 축복하였다.

고국을 떠나 머나먼 태국, 방콕이라는 타지에서 항상 적적해하시던 시부모님께는 더없는 기쁨으로 다가와

첫째의 탄생은 그 자체로 행복과 사랑의 전부였다.


그 누구보다도 아버님은 첫째를 많이 사랑해 주셨다.

당시 아버님과 남편은 사업을 같이 했었고 사무실은

집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

항상 점심시간이 되면 어머니가 첫째를 데리고 1층

사무실로 내려와서 태국 직원들과 인사도 하고

첫째는 그렇게 모두의 관심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첫째인 딸은 아버님이 이름을 지어주시기도 하였고

유난히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따르기도 했다.

천성이 순하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 외에 태국직원들까지 이뻐하다 보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이

모나지 않고 착하게 자라난 이유라고 생각이 들었다.

첫째인 만큼 나나 남편은 신경을 많이 썼고 게다가 딸이니 남편은 딸에 대한 애정이 더 특별했다.

돌 전에 밤잠을 설치며 잠투정을 했을 때도 남편은

인상 한번 쓰지 않고 딸을 재우려고 자주 안아주고

달래주었다.

지금도 남편에게 그 점은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딸이 가장 이뻤고 귀여웠던 4살 때 남편과 나는 딸을 태국 로컬 유치원에 보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외국에 사는 만큼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첫 단추로써 과감하게

한국 유치원이나 국제 유치원이 아닌 태국 유치원에

보냈다.

당시에 아버님이나 어머님께서 적지 않게 걱정을 하셨지만 우리의 의견을 따라 주셨고 딸도

나름 잘 적응해 나갔다.


지금도 가끔 딸과 어릴 적 얘기를 하면 그때는 어려서 태국인, 한국인 구별이 없었다고 한다.

단지 본인 사물함에 가방, 신발 등을 넣어두어야 하는데 사물함에 태국어로 딸 이름이 적혀 있어서

태국어를 그림처럼( 마치 상형문자 같이 보였다고 말했다.) 기억해 두고 자기 이름도 모양으로 기억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나 역시 딸이 잘 적응할지 걱정을 좀 했었다. 당시에 그 유치원에 외국인 학생은 우리 딸

혼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방콕에 살면서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딸은 현지인처럼 잘 적응하고 그 문화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다행히 딸은 친구도 잘 사귀었고 태국어도 곧잘 했었다.(물론 서울에 사는 지금은 태국어를 많이 잊어

버렸지만) 남편과 나는 첫째 딸이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온 신경을 딸에게 집중해 주었고 딸이 원하는 것, 하고 싶어 하는 것, 딸의 생각을 경청하고 환경이 허락하는 한 다 들어주었던 것 같다.


물론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은 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다. 내 기억에 딸은 크게 욕심을 낸 적도

없고 크게 무엇을 해달라고 한 적 또한 없었다. 유치원생 때는 매우 활달했었는데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많이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친구들이 딸의 훌라후프를 다 분해해서 다시 조립해 준 것을 보고 딸은 울기도 하고

속상해했었다. 나는 그때 딸을 많이 위로해 주고 친구들이 친하게 지내자고 너한테 그런 장난을 친 거라고

위로해 줬었다. 지금도 딸은 그때 자기가 많이 소심했었다고 얘기를 하곤 한다.




정확하게 딸이 몇 학년 때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한 번은 시험을 봤는데 딸이 50점 이하로 성적을 받아온 적

이 있었다. 나는 평소에 성적이 나오면 아무리 시험을 못 봐도 성적으로 혼을 낸 적이 없었다.

열심히 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다음에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음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딸은 해맑게 내게 50점 이하의 점수를

이야기하며 전혀 창피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딸을 혼내지 않았고 이해를 시켰다.

이것은 그렇게 잘 한 점수는 아니라고.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점수를 받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건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당시에 그 점수보다 딸의 자존감이 더 중요하다 생각되어서 아이의 기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 어릴 때 성적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의 첫 사회생활의 시작이 학교생활인데 성적보다는 인성과 사회성, 규율, 규칙 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딸은 다른 건 몰라도 항상 공평하고 공정하며 친구들을 잘 도와주고 솔선수범하는 학생으로 자라

났다.


2017년 딸은 한국으로 대학을 가면서 조금씩 성격이 달라졌다.

막상 한국에 오니 한국에서 자라고 배운 친구들과 생각과 가치관 면에서 많은 차이를 느꼈다고 말해주었다.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학에 입학한 아이들이라서 자기중심적이며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딸은 대학 1, 2학년때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다.

속마음을 토로할 데도 없고 엄마는 멀리 태국에 있고 할머니랑 둘이 살면서 불편한 점을 크게 말하지 않고

자주 내게 전화했었던 기억이 난다.

진정한 친구도 엄마도 아빠도 없어서 많이 외로움도

타고 했었다.

대학 3학년 이후부터 여리던 성격에서 적극적이고

강한 성격으로 바뀌었고 2년 동안 모든 행정처리를

혼자 하다 보니 학교 공부 외에 자기 할 일, 할머니 일등을 알아서 척척 하게 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딸은 직장인 3년 차다.

직장도 누구의 도움 없이 누구의 소개 없이 스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잘 적응하면서 다니고 있다.

이제는 내가 서울에 가면 오히려 딸에게 물어볼 때가 더 많다.

나보다 서울살이 8년 차로 알아서 더 잘 생활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남자친구가 내 자리를 대신 차지해서 내게 전화도 자주 하지 않는다.

난 서운하지 않다.

전화가 안 온다는 것은 잘 지내고 있다는 반증이다.






내가 엄마 노릇을 잘했다기보다 딸이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성장한 동안 많이 사랑받고 자라온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딸의 자존감을 지켜줬고 엄마로서의 내 자존감도 세워주었다.

내가 쏟았던 사랑만큼 지금 딸은 그 사랑을 내게 돌려주는 듯하다.

가끔씩 엄마가 자기를 믿어주고 이해해 준 것이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것을 기억해 주니 더 고마울 뿐이다.


사랑한다.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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