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9)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사과와 오렌지 (Still Life with Apples and Oranges)
- 작가 : 폴 세잔 (Paul Cézanne)
- 제작시기 : 1899년
- 전시장소 : 파리 퐁피두센터
언뜻 보았을 때에는 과일이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평범한 정물화 같았다. 하지만 미술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폴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는 평범한 정물화도 아니고, 잘 그린 정물화도 아니고, 가히 혁명적인 정물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이 내포하는 혁명적 성취는 워낙 유명하니 간략히 톺아보자. 당시 파리를 뒤덮은 사조는 인상주의다. 똑같은 풍경도 아침과 오후와 저녁에 다른 색조와 명암을 품는다. 맑은 날과 흐린 날에 다른 색조와 명암을 품는다. 그 찰나의 인상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게 인상주의 화가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인상주의로 출발한 세잔은 다른 것에 꽂혔다. 똑같은 사물도 이쪽에서 볼 때와 저쪽에서 볼 때 다른 형태를 띈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의 찰나를 포착하는 인상주의에서 조금 더 나아가, 시점에 따라 변하는 사물의 각 면을 포착해 하나의 시점으로 융합하는 탈인상주의의 길을 연 것이다.
<사과와 오렌지>를 슬쩍 보면 평범한 정물화이지만, 자세히 보면 과일마다 시점이 다르고 그에 따라 명암도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장면을 해체하여 각 사물의 입체적인 본질을 그리고 싶었던 화가 세잔의 집요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작품으로, 이 그림은 미술사에 혁명과 같은 획을 그었다.
그 의미만 기억하느라 정작 작품의 제작연도는 보지 못했다. 당연히 세잔의 초기 또는 중기 작품이며, 이러한 혁명의 성취로 그의 전성기를 연 시발점일 것이라 생각했다. 세잔은 20대 초반부터 그림을 그렸고 꾸준히 살롱에 도전했지만 철저히 무명이었다. 또한, 내성적인 성격으로 동료 화가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그런 그가 30년 넘게 그림을 계속 그려 56세 되던 해에 첫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소위 말하는 "대기만성형 화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혁명적 작품 <사과와 오렌지>는 그가 60세 되던 해에 완성하였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창의적인 시각으로 화제를 일으키며 나타난 젊은 천재가 아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30년 넘게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했으며, 자신만의 시각이 완성되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 노력형 수재인 셈이다.
세잔을 공부하면서 그의 여러 작품 이미지를 쭉 훑어보던 중 개인적으로 1887년작 <체리와 복숭아> 정물화에 시선이 꽂혔다. 여기서도 세잔은 시점의 해체를 보여준다. 체리 접시와 복숭아 접시의 시점이 다르고, 각기 다른 시점의 사물이 하나의 화폭에 나란히 놓인다. 그러나 <사과와 오렌지>와 비교했을 때, 전체적인 매무새가 썩 자연스럽지는 않고, 무언가 보기에 어색한 느낌이 든다. 각각의 피사체만 떼어놓고 보면 훌륭하지만, 각각 다른 시점으로 그린 피사체를 하나의 장면에 융화시키지는 못한 기분이다.
그로부터 12년이 더 지나서야 <사과와 오렌지>가 등장했다. 세잔은 그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자신만의 다시점 정물화를 연구하고 시도하였을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무명 화가가 그 오랜 시간 동안 한 우물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을 때 결국 미술사를 뒤흔든 혁명적인 작품 <사과와 오렌지>가 탄생할 수 있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한다. 보잘 것 없는 물방울이 톡톡 떨어질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끊임없이 집요하게 노력하면 바위에도 흠집을 낸다. 당장 눈에 띄는 성취가 없어도 계속 노력할 것, 집중할 것, 파고들 것. 그러면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낸다. 이때 바위도 뚫는 힘은, 오랜 시간 무한히 반복하는 에너지에서 온다. 인정하는 이가 없어도 수십년간 집요하게 노력하며 파고든 세잔의 노력, 그래서 환갑이 다 되어서야 이룩한 성취가 바위를 뚫은 낙숫물과 같다.
미술사를 공부하며 주워들은대로 작품의 시점과 원근감에 집중하여 감상하다가, 작품 인덱스에 적힌 제작연도를 보며 새롭게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