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바이트, 게르마니아 (1848)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게르마니아 (Germania)
- 작가 : 필리프 바이트 (Philipp Veit)
- 제작시기 : 1848년
- 전시장소 : 뉘른베르크 국립 게르만 박물관
기골이 장대한 여성이 검과 독일 국기를 들고 서 있다. 그런데 잠깐. 이 작품은 1848년에 그려졌고, 그 당시에는 우리가 아는 흑-적-금 3색 독일 국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독일이라는 나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그림, 의미심장하다.
<게르마니아>는 1848년 완성되었는데, 작가는 명확히 특정되지 않았다. 다만, 작품의 구도와 당대 상황을 감안하여 필리프 바이트의 작품 또는 그가 남긴 도안을 동료 화가가 채색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 필리프 바이트는 이로부터 약 12년 전에 이미 게르마니아 여신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에는 그림 속에 3색 깃발이 없었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지나 또 다른 게르마니아를 그렸다면 이유가 있을 터.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필요하다.
독일이라는 나라는 1871년 생겼다. 이 그림이 완성된 1848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해체 후 무수한 군소 국가의 연합체만 존재했을 뿐이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국가의 기틀을 정비하였고, 영국은 식민지를 개척하며 국력을 만방에 떨쳤다. 그것을 본 독일인(독일어를 사용하는 민족)도 그들만의 통일된 강국을 꿈꾸었지만 복잡한 시대상이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독일인은 민족 국가 수립의 염원을 담아 '게르마니아'라는 가상의 존재를 만들었다.
이것은 민족이 추구하는 가치를 상징하는 일종의 아이콘이다. 실존 인물도 아니고, 민족에 구전된 설화 속 영웅도 아니지만, 민족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가치를 '게르마니아'라는 여신의 형태로서 표현한 것이다. 마치 프랑스의 '마리안느'와 유사한데, 외젠 들라쿠르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등장하는 바로 그 혁명의 리더가 마리안느라는 점을 감안하면 '게르마니아'와 알고리즘이 유사하다.
이 그림에는 여러 함의가 담겨있다. 표현된 모든 요소가 의미를 갖는다. 여신의 월계관은 승리의 상징이고, 여신이 든 검은 가치를 수호하려는 의지다. 검과 함께 쥔 나뭇가지는 참나무인데 영속성을 뜻한다. 발 밑에 풀린 족쇄는 민족의 해방을 의미하고, 배경에 비치는 섬광은 일출의 느낌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 여신이 들고 있는 흑-적-금 깃발이 당시 통일국가의 출범을 요구하는 민중 세력이 채택한 세 가지 상징색이었다.
종합하면, 게르마니아 여신은 통일된 게르만 민족국가의 출범을 영속적으로 수호하며 새로운 시대의 승리를 쟁취한 존재다. 이것이 당시 수많은 민중이 원하는 이상향이었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1848년 시민과 부르주아 및 지식인 세력 위주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를 열어 입헌군주 헌법을 채택할 때 의사당 배경을 덮을 상징화가 필요해 급하게 완성한 작품이 바로 이 <게르마니아>인 것이다. 지극히 정치적인 그림이지만, 지극히 민중적인 그림이다.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결국 1871년 입헌군주제 국가로서의 통일된 독일제국이 출범하였다. 그리고 1차대전 이후 최초의 근대 헌법으로 꼽히는 소위 바이마르 헌법을 채택하며 1919년에 출범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게르마니아> 그림과 똑같은 흑-적-금 3색 깃발을 국기로 채택한다. 이 국기는 나치 치하를 제외하면 쭉 독일(분단 시절에는 서독)의 국기로 자리매김하였다.
결국 <게르마니아>는 100년 앞서 민족 국가 출범의 이상향을 제시한 선구자와 같다. 그 정신을 한 폭의 그림 속에 모두 표현하여 이를 보는 이들이 같은 염원을 품게 하여 결국 그 뜻을 이루게 하였다. 해석이 여기에 이르고나니 이 작품의 가치는 미술사가 아닌 세계사적 관점에서 풀이해야겠다. 한 민족의 염원이 여신의 형상으로 나타난 순간. 우리는 이런 것을 화신(化身)이라 부른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