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마르크, 멧돼지 (1913)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멧돼지 (Wild Boars)
- 작가 :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
- 제작시기 : 1913년
- 전시장소 :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
내가 디자이너는 아니고 심지어 문과 출신이지만 본의 아니게 포토샵 등의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하루종일 붙들고 있다. 이런 소프트웨어는 친절하게 "삭상 견본"이라며 주로 사용되는 컬러칩을 따로 모아서 보여준다. 파란색도 여러 채도와 농도가 있고, 빨간색도 그러하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니었다)에 들고 다니는 팔레트가 그런 용도였다. 그게 12색이었는지 30색이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주요 색상이 미리 세팅되어 있어서 내가 원하는 색을 찍어 칠하게 해주었다.
프란츠 마르크는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화가다. 미술에 큰 관심이 없던 시절, 마르크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지만 작품 속에 무언가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을 뽐내는 동물들, 그리고 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색상 견본처럼, 채도와 농도를 살짝 바꾸어 다양한 톤으로 변주되는 색채의 향연이 인상적이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그냥 마르크의 그림을 이미지로 저장해두었다가 내가 필요할 때 스포이드 툴로 찍어서 사용하면 내가 원하는 색으로 조절할 수 있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그림 자체가 팔레트에 다름 아닌데, 그것을 표현하는 따뜻하고 신비로운 하모니까지 모든 게 인상적이다.
<멧돼지>도 그러하다. 이 작품은 마르크가 청기사파를 결성하고 한창 주목받던 1913년 작품이다. 그는 이 시기에 일련의 동물 작품을 남겼다. 거기에는 말도 있고, 소도 있고, 여우도 있고, 고양이도 있다. 이 중에 '푸른 말'이 그의 대표작이어서 청기사파의 어원이 되었다. 돼지도 그가 자주 그린 대상이었다. 일반 돼지는 주로 탐욕이나 타락을 은유하는 상징으로 쓰였다면, 멧돼지는 때묻지 않은 신비로운 자연의 피조물로서 인간이 회복해야 할 순수의 가치를 은유하는 상징으로 쓰였다.
캔버스의 한가운데에 푸른 멧돼지가 웅크리고 있다. 그는 풀밭 위에 앉아 꽃내음을 맡는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는 붉은 암퇘지가 독자를 응시한다. 그렇다면 흥미롭다. 멧돼지는 순수를, 암퇘지는 타락을 은유하는데, 이 정반대의 가치가 함께 있는 셈이다. 푸른색과 붉은색 역시 각각 순수와 공포를 상징한다. 상반된 메시지가 중첩된 이 그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시기 독일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 작품이 탄생하고 불과 1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청기사파는 해체된다. 마르크도 군인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쟁터에서 사망하였다. 즉, 이토록 혼란한 폭풍전야의 시기, 마르크는 혼돈의 현실을 붉은 암퇘지로, 그것을 극복하여 순수를 되찾아줄 이상적인 '히어로'를 푸른 멧돼지로 은유한 것이다.
작품 속에 푸른색, 붉은색, 초록색, 노란색 계열의 다채로운 "색상 견본"이 펼쳐짐은 물론이다. 마치 RGB 코드를 외운 사람처럼 시각적으로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다채로운 색의 향연, 배색과 보색이 완벽한 팔레트를 만들어낸 마르크의 진가가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