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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석은 짝사랑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 소녀의 초상화 (1909)

by 유상현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소녀의 초상화 (Portrait of a Girl)

- 작가 :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 (Alexej von Jawlensky)

- 제작시기 : 1909년

- 전시장소 : 뒤셀도르프 예술궁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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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으로 뮌헨에서 그림을 배우고 표현주의 그룹 '청기사파' 출범의 주역 중 한 명이 된 야블렌스키. 아직 청기사파가 탄생하기 전인 1909년에 뮌헨에서 완성한 <소녀의 초상화>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야수파의 대가 앙리 마티스를 연상케하는 과감하고 비현실적인 색채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그림을 공부하면서 이 작품에 대한 소위 미술 전문가들의 해석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한 소녀가 불안한 내면을 억누르고 있는 것을 야블렌스키만의 스타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비현실적인 강렬한 채색과 거친 선이 그 표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물론 야블렌스키는 직접 자신의 작품을 해설한 바 없기 때문에 이 또한 "정답"이라기보다는 분석과 해석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내가 이 작품을 미술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은 사뭇 달랐다.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고 입을 살짝 가린 소녀, 머리를 단정히 땋고 손끝에 살짝 붉은 색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꽃단장' 곱게 한 듯하다. 불안한 내면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러워하고 부끄러워하지만 예뻐보이고 싶은 내면을 느꼈다.


느낌이 여기에 이르고나니 작품의 다양한 디테일을 꿰어맞추게 된다. 가령, 연두색 피부톤은 "덜 익은 풋풋함"을 표현한 것 같다. 푸른 색의 강렬한 배경은 고요한 감정으로, 유독 튀는 붉은 치마는 소녀의 내면을 채운 강렬한 에너지로 해석된다.


이상을 종합하면, "상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강렬한 마음을 품고 있으되 표현하기 부끄러워 고개를 돌린 채 수줍어하는 풋풋한 소녀"가 된다.


불안함이 아니라 설렘과 수줍음, 억누름이 아니라 부끄러움. 내가 느낀 감정의 선은 전문가들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전문가들의 해석은 이 작품 하나에 국한하지 않고 작가의 전체적인 생애와 작품을 두고 입체적으로 접근할 테니 그들의 해석이 옳겠지만, 이 작품 속 우주로 범위를 좁히면 완전히 다른 해석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림 감상하는 재미가 조금 더 풍부해졌다.


그래서, 나의 해석은 "풋풋한 짝사랑"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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