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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목소리가 들려

에드바르 뭉크, 죽음과 아이 (1899)

by 유상현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죽음과 아이 (Death and the Child)

- 작가 :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 제작시기 : 1899년

- 전시장소 : 브레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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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의 대표작 <절규>는 그 특유의 표정과 손짓이 일종의 '밈'처럼 소구되면서 코믹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작품의 메시지는 문자 그대로 "절규"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뭉크는 하늘이 핏빛으로 변하며 죽음의 절규가 들렸다고 표현했다. 그 소리를 듣기 싫어 귀를 막고, 제발 그만 하라며 소리 지르는 모습이 그림에 담긴 것이다.


<절규>의 배경이 된 장소는 실제로 존재한다. 혹자는 뭉크가 해당 장소를 지날 때 환청을 겪고 괴로워한 경험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분석하고, 혹자는 뭉크의 내면을 잠식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 것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1893년에 뭉크가 <절규>를 그릴 때 그를 지배한 감정의 키워드는 "죽음"과 "공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뭉크는 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다. 14세 되던 해에 누나도 잃었다. 둘 다 결핵이었다. 여동생은 이후 정신질환을 앓았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사별한 트라우마 때문일까, 뭉크 역시 지독한 우울증과 신경쇠약 증세를 겪었고, 죽음에 대한 이 감정은 평생 그를 괴롭힌다.


그래도 1893년작 <절규> 덕분에 뭉크는 화가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그는 비교적 안정된 커리어를 지속하였다. 그러던 그가 6년이 더 지나 <죽음과 아이>를 발표했다. 작은 아이가 귀를 막고 있고, 그 뒤로는 침대에 누운 창백한 시신이 보인다. 마치 6년 전의 <절규>처럼, 뭉크는 또 다시 귀를 막았다. 그에게 다시 죽음의 절규가 들렸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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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앞에 귀를 막은 어린아이는 다섯 살의 나이로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한 뭉크의 자아를 은유한다. 그런데 유령처럼 유체이탈하며 비명을 지르는 <절규>의 인물과 달리, <죽음과 아이>의 인물은 아이의 형상으로 귀를 막고 있다. <죽음과 아이>는 초현실적인 <절규>의 사실적인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귀를 막고 있는 아이의 표정에 눈길이 간다. 그야말로 무표정,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다. 하긴, 가족의 죽음을 보는 앞에서 정신줄을 잡고 있을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일부러 정신줄을 놓아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아이를 보는 기분이 들어 더욱 감정의 몰입을 이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들리는 죽음의 절규 앞에 힘껏 귀를 틀어막아도 나아지는 건 없다.


이제 어느정도 재능을 인정받으며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촉망 받는 젊은 화가 뭉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를 회고하면서, 1893년에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던 <절규>와 달리 1899년에는 저항할 기운조차 남지 않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인 감정선의 변화를 느낀다.


더 사실적이어서 더 몰입된다. 더 쓸쓸하고, 그만큼 더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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