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노의 빙하는 시간처럼 장엄하게 누워있다. 그리고 이제 무너져 내린다.
빙하의 역사
파랗다. 얼음색은 하얗지 않다. 푸른빛이다.
빙하가 녹은 물도 그렇다. 역시 푸른색이다.
푸른색은 침묵의 색이다.
추운 바다에 발을 담그고 수만 년을 기다리면 하얀 물이 파란 물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인고의 시간을 뒤로하고 빙하는 다시 물이 되어 흐른다.
파타고니아. 남미의 끝자락
시간이 머물다 가는 곳.
이곳에 오려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왔다.
나그네는 장엄한 빙하 위에 선다.
얼음이 아니라 얼어붙은 시간들 위에 선다.
시간이 시작되고 시간이 끝나는 곳.
거긴 침묵이다.
푸른색이다.
빙하가 녹는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
녹는 것은 단순하다. 기온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온이 올라가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지구 온난화를 설명하는 가장 대중적인 것이 공해이다.
환경이 오염되고, 이로 인한 대기가스가 지구를 둘러싸서 온실효과로 지구 온도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반론이 있다. 남미는 공해가 없다. 온실효과도 없다. 그런데 기온이 올라간다.
또 과거 빙하기가 끝나고 해빙기가 왔을 때도 환경오염이나 온실효과는 없었다는 것이다.
지구는 혼자 더워졌다 식었다 하면서 건강을 유지한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
빙하의 인내심. 그것 때문일 수도 있다.
빙하가 지친 것이다. 더 이상 얼음으로 살기 싫은 것이다.
시간 때문이다. 빙하도 시간이 흐르는 것이 무서운가 보다. 나처럼 그런가 보다.
빙하도 늙었나 보다.
시간이 무너지다.
설원이다.
세상엔 하늘과 얼음밖에 없다.
보이는 것은 장엄한 얼음의 바다이다.
만년도 넘은 얼음들 위에서 나는 만년도 넘은 시간들을 징검다리처럼 뛰어넘는다.
만 년 이는. 백 년이든 별 상관이 없다.
시간은 똑같다. 끝이 있다. 그리고 모든 시간은 그 끝을 향해 달려간다.
얼어서 정지해 있던 것 같던 시간이 무너진다.
빙하가 무너진다.
오랜 침묵을 깨고 소리치며 무너진다.
시간처럼 무너진다.
빙하도 끝이 나고
나도 끝이 난다.
시간 때문이다
21 Feb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