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때문이다. 비가 왔다. 바다도 등대도 나그네도 빗속에 있었다. 그날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배를 탔다. 그런데 말짱하던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배를 타니까 비가 온다.
나는 잠시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인과관계를 따져 본다. 정녕 배를 타니까 비가 온 것일까. 아니면 비가 오니까 배를 탄 것일까.
나의 고민거리들이 늘 그렇지만 사실 배를 탔다는 것과 비가 내린다는 것은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인과관계 혹은 stimulation and reaction의 상관관계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가? 정말 그런가?
그게 아무 관계도 없을까.
돌이켜보니 배를 탄 것이 먼저이고 비가 내린 것이 나중이다.
그러니까 내가 비를 피해서 배를 탄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바다 위에 비가 내린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비가 내리는 바다로 배가 떠난다.
난 이제 바다 위에 있다. 비 오는 바다는 설명이 불가하다.
바닷물이 끓는 것 같다. 팔팔 끓는 물 위에 내가 떠 있는 것 같다.
등대는 거기에 있었다.
신기하다. 등대에 도착하기 전까지 비가 내렸다.
그런데
등대에 도착하니까 비가 그쳤다.
나는 또 고민한다.
비가 그치니까 내가 등대에 도착한 것일까.
혹은
내가 등대에 도착하니까 비가 그친 것일까.
아니면
그 둘을 서로 인과관계 혹은 상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별개의 사건인 것인가.
내 마음의 등대.
등대가 외롭다거나, 등대가 있는 외딴섬이라든가. 그 섬 언저리를 때리는 파도라든가. 하는
통속적인 시의 구절 혹은 유행가 가사가 한 개쯤은 떠 올라야 하는데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다.
하늘과 바다와 바람과 비.
지금 나의 관심은 오로지 그것들뿐이다.
내가 무사히 이 남극으로 가는 지구 끝 항로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안전하게 우수아이아 항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나는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다.
비 오고, 파도치는 바다는 무섭다.
남미에서 남쪽으로 가는 바다에 마지막 등대이다.
거기서 나는 전혀 쓸데없는 생각들만 하였다.
나는 내 마음에 등대 하나쯤 있어야 하는데 없음을
또는
내가 남에게 등대가 되어 준 적이 없음을.
그런 고상하고도 철학적이며 이지적인 생각들을 했어야 했다.
늙은 나그네는 참 속이 없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그 좋은 바다여행을 전혀 비본질적이고 유익하지 않은 잡생각만 하다가 돌아왔다.
내가 헛생각들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우수아이아에 도착한 이후이다.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나는
쓸데없는 걱정과 추측과 예단으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다고 후회한다.
나는 늘 그렇다. 이번뿐 아니다. 일상이 그렇다.
그리고 그건 순전히 비 때문이다.
2 Feb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