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내가 결혼하던 시절, 제주도는 신혼여행지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이었다. 해외여행이 제한적이었기에 대부분의 신혼부부에게 제주는 신혼여행의 성지였다. 아내도 제주로 가기를 원했지만, 나는 경비를 아끼겠다는 이유로 고집을 부렸다. 결국 우리는 비행기 대신 기차와 버스를 타고 부산과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아쉬운 선택이었다. 만약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신혼여행지를 제주로 바꾸고 싶다.
우리 부부가 처음 제주를 찾은 것은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 여름이었다. 손위 동서네 가족과 함께 가이드가 운전하는 봉고차를 타고 제주 곳곳을 둘러보는 패키지여행을 했다.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계획을 변경해 마라도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직장 일로 제주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처음 제주를 다녀온 지 3년 만에 출장길에 올라 눈 덮인 한라산 백록담을 오른 것을 시작으로, 연수 또는 출장 형태로 여러 차례 제주를 찾았다. 마라도에도 다시 가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제주에 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동료들에게 기회를 양보하기도 했다.
반면 아내는 아들이 군대에 입대한 다음 달에서야 비로소 나와 함께 제주를 방문했다. 13년 만의 제주 여행이었다. 아내는 아들을 떠나보낸 상실감에 힘들어했지만, 제주를 여행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몇 년이 지나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긴 우리는 국내외 여러 곳을 함께 여행했다. 그러나 제주만큼은 늘 특별한 설렘을 안겨 주었다. 푸른 바다와 오름, 너른 들판과 곶자왈이 주는 감동은 매번 새로웠다. 그렇게 2014년부터는 거의 매년 제주를 찾았고, 한 해에 봄과 가을 두 번 방문한 적도 있었다.
제주올레 이사장이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재직했던 시사 잡지를 통해 조성 초기의 올레길을 접했고, 쇠소깍에서 간세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유명 관광지만 스쳐 지나가던 제주가, 그날부터는 마치 옆 동네를 거니는 듯 친근하고 정겨운 곳으로 변해갔다.
제주를 찾을 때마다 2박 3일에서 4박 5일 정도의 짧은 일정이었기에 올레길을 온전히 걸어보진 못했지만, 언젠가 완주하겠다는 꿈을 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조금씩 걸었다. 올레 완주는 나와 아내에게 도전이자 목표였다. 퇴직한 후에야 가능하리라 생각했지만, 다행히 예상보다 빨리 기회가 찾아왔다. 20년 이상 재직한 직원에게 주어지는 20일의 장기재직 휴가 덕분이었다. 이 제도가 도입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동년배 동료들은 휴가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며칠 지나면 다시 출근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쓰기로 했다. 오랜 직장생활에 지쳐가던 나는 이번 휴가를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삼고 싶었고, 올레 완주는 그 결심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올레 축제 기간에 맞춰 제주로 떠난 첫날, 우리는 성산일출봉 근처의 허름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내일이면 많은 올레꾼들과 함께 걷는다는 생각에 설렘 가득한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침대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야! “
아내가 침대 모서리에 발가락을 부딪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가락이 부어올랐다.
너무 늦은 저녁이라, 다음 날 아침에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반 깁스를 해야 하며 일주일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나, 어떡해... “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를 난처한 궁지에 몰아넣고 반응을 보려는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얻은 한 달의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 버리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이 여행은 인생의 전환점과 같은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고민 끝에 말했다.
"당신은 서귀포로 가서 차를 렌트하고 여행을 즐기다 올라가. 나는 올레 완주를 계속할게. “
짐을 꾸리며 아내와 내 짐을 분류하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언젠가 맞이하게 될 긴 이별이 떠올랐다. 마치 서로 다른 길을 암시하는 듯한 두 개의 가방. 몇 번이고 ”나도 올레 걷고 싶어 “ 하던 아내가 결국 터졌다. 아내가 울면서 말했다.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야. 당신 혼자 남아서 올레 완주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 말은 가슴 깊이 박혔다. 짐을 나누어 담던 손이 멈췄다. 나는 가방을 옆으로 밀어놓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결국 우리는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차를 빌려 아내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곳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대부분 이미 방문했던 곳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함께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미련이 남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시간들이 내 마음을 채워나갔다.
제주에 머문 지 12일째 되는 날, 우리는 차를 반납하러 간 김에 제주 시내의 종합병원을 찾아 아내의 상태를 확인했다. 의사는 말했다.
"올레 걷고 싶다고요? 그럼 걸으세요.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 됩니다. “
다음날부터 우리는 올레를 걸었다. 2주 동안 비록 완주하지는 못했지만, 손을 잡고 서로를 이끌었던 기억은 완주보다 더 소중했다. 우리의 한 달간 제주 여행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그 시간은 내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행도, 인생도 완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시간이 더욱 의미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음 해에도 다시 올레를 찾아 함께 걸었고, 마침내 완주 증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