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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에서

나희덕

by Jaeyoon Kim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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