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우울감이 심해졌다.
처참한 기형아 검사 결과에
임신에 따른 호르몬 기복까지 더해지니
아주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우울감을 이기기 위해!
이럴 때일수록
더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우리 집안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하지만 병원에서 식도락을 즐기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우선 병실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입원한 병동이 신경과 병동이다 보니
대소변을 못 가리는 이웃과 자주 동침했다.
그리고 이웃들이 당뇨 환자인 경우가 많아
우리가 음식 냄새를 풍기는 게 실례일 때도 있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병원 탈출계획.
밖에서! 쾌적하게! 맛난 저녁을 먹자!
목적지는? 병원 코앞에 있는 치킨집!
우울을 이기기 위해 일탈을 나에게 부여해 본다.
나와 남편은 여행을 참 좋아한다.
MBTI로 따지면 나는 P, 남편은 J.
우리는 서로 여행 스타일이 꽤 다르다.
그럼에도 쿵짝이 참 잘 맞는다.
우선, 나는 결정은 잘 내리는데 길치다.
남편은 길을 참 잘 찾지만 약간의 결정장애가 있다.
그래서 우린 여행을 할 때 내가 목표를 세웠고, 남편이 최적의 루트를 찾아줬다.
이번 병원 대탈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목표를 부여하자 남편이 최적의 루트를 찾기 위해 염탐을 시작했다.
"정문, 옆문에는 가드가 있어서 안돼.
그런데 응급실 쪽 후문엔 가드가 없더라?"
탈출 루트가 확보되니
다음 문제는 환자복이다.
여기 환자복은 형광 하늘색이다.
아주 눈에 띈다.
그래서 병원복 속에 사복을 껴입고
화장실에서 갈아입기로 협의했다.
휠체어는?
스티커가 이곳저곳 붙은
병원 휠체어를 사용 중인데
겉옷을 활용해 적당히 로고를 가리기로 한다.
탈출 시간대는?
혈압/혈당 측정 후
간호사님들의 출입이 덜한
저녁 시간대를 노리기로 했다.
오래간만에 뿜어져 나오는 도파민에
심장이 두근두근 하다.
어서 떠나자!
2024년 11월 29일(금)
저녁 5시 30분
결전의 시간이다!
비장했던 마음과
철저했던 준비 덕분에
탈출은 아주 매끄럽게 진행됐다.
구석에 있는 화장실에서 옷을 환복하고
응급실 쪽 출구로
남편이 휠체어를 재빠르게 움직인다.
순식간에 찬 공기가 나를 감싼다.
다행히 휠체어를 탄 외래 환자들이 주변에 함께 있어
우리는 거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병원 근처라 그런지
인도가 제법 휠체어 친화적이다.
목표인 치킨집 또한 들어가는 문턱이 휠체어도 다닐 수 있게 오르막길 처리가 잘 되어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사장님이 익숙하게 의자 하나를 빼서 휠체어의 자리를 만들어준다.
설레는 마음으로 양념반 후라이드반 치킨을 시킨다.
남편은 생맥주 한잔을 시킨다.
치킨을 먹으며
괜히 유리창 밖에 사람들을 경계한다.
당연히 아무 일도 없다.
남편이랑 깔깔대며 치킨을 먹다 보니
우울했던 마음이 또 사라진다.
참,
인생이란
사람의 마음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2024년 11월 30일(토)
오늘은 점심을 노려 근처 소고기 집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두 번 해봤다고 이젠 아주 꾼이다 꾼.
후다닥 고기를 구워 먹고
몸에 밴 냄새가 껄끄러워
병실에 가자마자 샤워하고 환복 한다.
들키지 말자! 완전범죄!
2024년 12월 1일(일)
엄마, 아빠가 전날 담금 김장김치와 수육을 들고 병문안을 왔다.
수육 한가득
김장 한가득
넘치는 인심에
너무 많이 싸왔다고 손사래를 친다.
그러다 보쌈과 김치를 한입 딱 먹고,
미미(美味)를 외친다.
아주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김장 김치의 짜릿한 짠맛과
수육의 야들야들한 감칠맛이 더해진다.
엄마, 아빠가 열심히 먹는 나와 남편을 보고 흐뭇하게 웃음을 짓는다.
나와 남편은 계속해서 쌍따봉을 날린다.
수육, 김장 최고!
엄마, 아빠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