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잃고 홀몸이 되니 재활에는 불이 붙었다.
참 역설적이기도 하다.
모종의 이유로 척수염이 생기면
마비 등의 증상이 최고조에 도달한 이후
4~8주 동안 서서히
3~6개월 동안 빠르게
그 후 2년까지는 다시 서서히 회복된다 한다.
회복 정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인데
1/3은 정상인 수준으로 회복되고
1/3은 경미한 장애가 남고
1/3은 심각한 장애가 남는다.
내 병은 2024년 10월에 발발했으니
2025년 1월부터가
빠르게 회복되는 3~6개월의 재활황금기였다.
지난 2024년 10월~12월의 난
휠체어와 남편 없이 아무것도 못했다.
연말로 갈수록 보행기로 걷는 척은 할 수 있었지만
보호자의 감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2025년 1월부터는
본격적인 자립 준비를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계기도 하나 있었다.
남편의 복직은 1월 말로 잡혔고
나의 복직은 병가가 3개월 더 연장되며 4월 중으로 잡혔다.
남편이 없는 동안
고맙게도 엄마가 간병을 도와주기로 했지만
남편과 엄마는 체력적 차이가 크기에
24시간 상주를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홀로서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남편의 복직 초읽기와 함께
휠체어를 떼고 부축받아 걷기부터
폴대나 지팡이를 사용해 혼자 걷기까지
나를 일상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초집중 재활이 시작됐다.
마감일이 생기자 재활치료사님들는
더 열기를 다해 나를 훈련시켜 주기 시작했다.
내 질병은 불운이었으나
E 대학병원은 내게 행운이었다.
발병 당시 나는 임산부였고
E 대학병원은 산부인과의 힘이 강했다.
덕분에 나는 신경과에서 각종 검사와 치료를 굉장히 빠른 순번으로 받을 수 있었고
재활의학과에도 무사히 전과했다.
그리고 내게 배정된 재활치료사님들 네분 모두
젊고, 실력 있고, 열정적이어서 더 행운이었다.
그들은 내가 입퇴원을 반복했음에도
매번 스케줄을 조정해 계속해서 함께 해주었다.
게다가 치료사님들의 조합도 참 기가 막혔다.
운동치료의 경우
광쌤은 듬직한 태도와 빡센 근육훈련으로
내가 무언갈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이끌어줬고
정쌤은 세부적인 디테일을 만져줘
내가 보다 정상적인처럼 걷게 만들어 줬다.
작업치료의 경우
빈쌤은 같은 동성으로서 챙겨줄 수 있는
섬세한 일상 훈련을 진행해줬고
별쌤은 멘탈케어를 동반한 꾸준한 반복훈련으로
내가 보다 빠르게 일상해 적응하게 도와줬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별쌤은 참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는 하루 일정 중 비는 타임이 생길 때마다
내 치료를 추가적으로 봐줬다.
필요할 때는 채찍질해 주고
내가 힘들어할 때는 친구처럼 멘탈 케어까지 해줬다.
1월 내내 치료사님들과 맹 훈련을 펼친 결과
나는 보호자의 부축을 받거나 폴대를 잡고는
병원과 같은 실내의 평지는 얼추 잘 걷게 됐다.
내가 다시 일어서고 걷는 데에는
정말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함께했다.
남편의 든든한 지원과 가족들의 응원뿐만 아니라
의료진들의 도움 또한 정말 많이 받았구나 생각한다.
특히 E 대학병원의 재활치료사님들은
나를 다시 걷게 하기 위한 최선의 서포트를 다해줬다.
그리고 교수님, 간호사님들에게도 참 감사했다.
현장에는 멋진 의료진들이 참 많구나를
이번 투병기간 동안 느끼게 됐다.
이 자리를 통해 나를 케어해 준 의료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교수님들, 간호사님들, 재활치료사님들!
쌤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