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문을 열어 왕의 욕망을 전한 메신저
우리가 간절히 바랐던 것을 이루고자 할 때, 그 욕망이 독이 되어 돌아온 적이 있으신가요? 혹은 독이 되어 돌아올 것을 알아도 그 길을 가시나요? 여기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기꺼이 독을 맞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신라의 경덕왕입니다. 그리고 경덕왕의 얘기를 대신 전해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신라의 명승, 표훈(表訓)입니다.
통일 신라의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던 경덕왕.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단 하나,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 하며 밤잠을 설쳤습니다. 왕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바로 표훈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는 불교의 교리를 설파하는 승려를 넘어 하늘의 상제(上帝)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덕왕은 표훈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부탁을 합니다. "하늘에 올라가 상제께 청하여 나에게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전해주시오." 표훈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하늘로 올라갔고 돌아와 이렇게 전합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은 줄 수 있으나 아들은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욕심이 생긴 경덕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다시 한번 청해주시오."
표훈이 다시 하늘에 오르자 상제는 엄중히 경고합니다. "하늘의 이치를 어기고 딸을 아들로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왕이 된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표훈은 이 경고를 그대로 전했지만 아들에 눈이 먼 경덕왕은 대답했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워지더라도 아들만 얻는다면 한이 없겠소."
이렇게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태어난 인물이 바로 신라 중대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혜공왕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원래 여자로 태어날 운명이었기에 여자들이 하는 놀이를 좋아하고 여성스러운 성격을 가졌다고 합니다. 결국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신라는 극심한 반란과 혼란에 휩싸였고 혜공왕은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통일신라의 왕권을 강하게 쥐고 있던 무열왕(김춘추) 직계의 왕위 계승이 끝나고 맙니다.
전설만을 따르면 표훈은 왕의 가장 사적인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 하늘의 문을 두드린 메신저 역할에 그칩니다. 그런데 사실 표훈은 단순히 왕의 심부름꾼 역할에서 끝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도모했던 정치적 조언자였습니다. 표훈은 의상대사의 제자로서 당시 불교의 학문인 화엄학의 대가였습니다. 이런 그의 배경을 활용해 불교적 신통력이라는 명분으로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표훈처럼 나의 소원을 대신 들어줄 강력한 존재를 원하곤 합니다. 하지만 표훈과 경덕왕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면서까지 얻어낸 성취가 과연 진정한 축복일까요? 억지로 꿰맞춘 욕망은 결국 그 끝에서 더 큰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경계에서 왕의 욕망과 신의 경고를 동시에 목격했던 표훈. 그의 일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간절함은 산을 옮기지만 그 간절함이 이치를 벗어날 때 당신의 삶 또한 흔들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