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신화 너머, 오래된 기술이 바꾼 세계
오늘의 책은 데이비드 에저턴의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계기는 대학원 수업에서 서평 과제가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깐 꽤 재밌더라고요. 과학기술사와 사회사를 적절히 결합한 이 책의 내용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별개로 좀 어렵긴 했지만요. 그럼 이 책은 어떤 내용이길래 흥미로우면서도 어려운지 얘기해보겠습니다!
데이비드 에저턴의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원제: The Shock of the Old)는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혁신”과 “첨단” 중심의 기술사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책입니다. 흔히 20세기와 현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행기, 컴퓨터, 원자력, 인터넷 같은 ‘최신’ 기술의 등장이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에저턴은 이런 관점이 실제 기술의 역동성과 사회적 영향력을 심각하게 왜곡한다고 얘기하고 있죠. 이 책은 “기술의 역사란 발명과 혁신의 연속”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실제로는 ‘사용되고 있는 기술’이야말로 인류의 삶과 세계사를 결정짓는 진짜 주인공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합니다.
에저턴은 기술의 역사를 “발명→혁신→진보”라는 단선적 시간선이 아니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공존한다고 보았죠. 석유가 대체한 줄 알았던 석탄이 여전히 20세기 후반까지도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었고, 2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많은 말이 동원된 전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자동차보다 더 많은 자전거가 거리를 달리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최신' 기술이 반드시 기존 기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죠. 또한 콘돔, 자전거, 양철지붕 같은 ‘비주류’ 기술들이 실제로는 수십억 인류의 일상과 사회 구조에 미친 영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얘기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에저턴은 “새로운 것이 항상 더 나은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전쟁, 산업, 일상생활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예컨대 르완다 대학살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총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도구인 마체테(칼)였다는 지적은 기술의 ‘혁신’만을 찬양하는 시각에 강한 경종을 울리고 있죠.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기술의 ‘사용과 유지’에 주목하여서 과학자나 엔지니어의 발명 자체보다 그것이 실제로 쓰이는 과정, 유지 보수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나갑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신 기술과 구 기술이 공존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식 기술이 재발견·재활용되며, 사회적 필요와 맥락에 따라 기술의 가치가 달라지는 복합적인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뒤처진 것’이라 여겼던 기술들이 사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죠.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는 “혁신=진보”라는 단순한 공식에 의문을 던집니다. 책에서는 계속해서 기술의 역사가 곧 사용의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사회를 움직이고 역사를 바꾼 것은 눈부신 신기술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다듬어지고 적응된 ‘낡고 오래된 것들’ 임을 수많은 사례로 입증해 나가는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이 책은 기술과 사회,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작품입니다.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것’만 쫓을 것이 아니라 '익숙하고 오래된 것들', 주변부에 머물던 것들을 돌아보게 하죠. 그것이 꼭 새로운 기술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다양한 가치와 철학 중에서도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도 돌아볼 수 있겠죠. 기술과 역사의 결합을 통해서 철학에까지 도달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의 역사는 발명이나 혁신의 순간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얼마나, 누구에 의해 사용되었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