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질투와 늙은 욕망 속에서
하나의 책이 영화나 드라마로 영상화되거나, 영화나 드라마가 책으로 출판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문제는 새로운 창작물로 바뀌는 과정에서 원작이 훼손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다루어볼 책 <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2010년 출판, 영화는 2012년에 개봉하였는데 두 작품이 핵심적으로 다루는 주제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늙은 스승의 욕망을 미친 듯이 탐구하고 있죠. 그렇다면 소설은 어떨까요? 이 글에서 한 번 다루어보겠습니다.
박범신의 <은교>는 나이 든 시인의 욕망과 순수, 삶의 마지막 순간에 마주한 본연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적나라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입니다. 노시인 이적요와 젊은 여고생 은교, 그리고 이적요의 제자인 소설가 서지우라는 세 인물 사이의 미묘하고 격렬한 감정의 격동이 핵심인 작품이죠. 감정의 격동 속에서 이 작품은 욕망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시인 이적요가 은교에게 품는 감정은 단순히 '금지된 욕망'이 아닙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젊음, 시간, 그리고 순수함 그 자체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이죠. 그녀의 작은 몸짓과 말투, 숨결 하나하나에 이적요는 살아 있다는 감각, 늙음과 죽음 앞에서 잠시 살아 오르는 희망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적요의 파멸적 욕망이 마냥 추하게 보이지만 않습니다. 늙어감을 마주한 인간이 마지막 남은 감각과 열망에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치욕과 순수의 경계를 넘나들며 섬세하게 보여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지우는 겉으로는 성공한 젊은 소설가이자, 노시인 이적요의 마지막 제자라는 명함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스승에 대한 선망과 질투가 가득 차 있죠. 스승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구축하려 하지만, 대문호의 거대한 벽 앞에 절망하죠. 때문에 그는 자기 안의 결핍과 스승에 대한 우월감을 찾기 위해서 은교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욕망과 불안을 거칠게 드러내 보입니다. 그리고 은교를 두고 이적요와 벌이는 욕망의 대치에서 강한 압박과 두려움을 느끼죠.
이 부분이 결국 소설과 영화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이적요의 노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때문에 은교를 중심으로 이적요와 서지우라는 욕망들의 대치가 중심입니다. 하지만 소설 이적요와 서지우라는 욕망과 추억, 질투와 애증이 교차하면서 녹여내는 인생의 온갖 복잡한 감정이 중심입니다. 은교는 둘의 감정을 끄집어내고 폭발시키는 역할처럼 느껴지죠.
이 소설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박범신 작가가 써 내려간 보기 편하면서도 시적인 문장들입니다.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늙음’과 ‘욕망’,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한 줄 한 줄 조심스럽게 집어내준답니다. 그리고 이 문장들은 늙음, 욕망, 젊음, 아름다움을 넘어서 간절함과 애틋함 느끼게 합니다. <은교>, 감정의 근원을 솔직하게 응시할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나는 네게서 청춘의 냄새를 맡았고, 나는 나의 늙음을 너에게 덧입혀 다시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