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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의 부럼 깨기

2025년 2월 12일 열 일곱 번째 일기

by 무무 Mar 05. 2025

오늘이 무슨 날인가? 정월 대보름이다. 정월(1월)의 보름날을 가리키는 말인데, 전통적으로는 더 성대하게 지내기도 했던 명절이라고 한다. 대보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부럼, 약밥, 귀밝이 술, 나물 등등. 그중에서 오늘은 부럼 깨기를 했다. 부럼 깨기를 하고자 한 계기는 별 거 아니었다. 아니면 별거였을 수도 있고. 25년 1월을 거치며 심적이든 육체적이든 피곤하고 아픈 일이 많았다는 말을 종종 했는데, 그에 대한 반항 같은 거였다. 어떻게든 행복과 안녕을 챙기기 위한 몸부림으로 몇 가지의 생각을 했다. 이 일기처럼 글을 쓰는 것, 공부를 하는 것과 같은 마음의 양식 차원에서의 개선이 있다면, 또 한편으로는 순전히 나의 재미와, 다음을 살아갈 원동력을 줄 만한 게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월간 행사와 제철 음식 먹기였다. 제철 음식 먹기는 약간 흐지부지 되고 있는 상태지만(다시 추진할 것.) 월간 행사는 오늘 첫 막을 무사히 올렸다.


혼자 행사를 하거나, 남자친구와 둘이 하기에는 나 혼자 준비를 하게 되기도 하고, 재미도 별로 없을 것 같아서 회사 동료, 정확히 얘기하자면 입사 동기 3명과 함께 하기로 했다. 입사 당시 같은 사업국에 배정이 되었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도 있다. 특히 좋았던 건 4명이라는 거. 무언가 조직을 꾸릴 때 4명은 어느 정도 이상적인 숫자로 보이는데, 양적으로도 적당하고 두 명식 짝을 지을 수 있어 좋다. 그들도 삶에 지쳐있었던 건지, 일상의 소소한 재미가 필요했던 건지, 둘 다였던 건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여주었다.


사실 자세하게 구상한 것은 없었다. 각 달의 상징적인 것, 각 달의 특징적인 것 하나를 골라 관련된 날이나 원하는 날에 같이 모여 추억을 만드는 것. 그리고 이를 기록하기 위한 SNS 계정을 하나 만들어 서로 돌아가며 글을 업로드하는 것. 크게는 딱 두 가지였다. 이벤트 선정을 위해 Chat GPT에게 2월에 할 만한 행사 알려달라고 했다. 설날 명절맞이 체험, 겨울 축제, 스키 등등 시의성이 안 맞거나 약간은 재미없는 주제들이 나오다 네 번째 주제로 ‘대보름 축제 즐기기’를 제안했다. 달집 태우기, 쥐불놀이 같은 정말 본격적인 행사들을 추천하길래 몇 개를 넘기다 보니 또 네 번째 주제로 ‘부럼 깨기‘가 나왔다. ’부럼‘이라는 소소한 준비 도구가 필요하고(물리적 수단), 함께 모여 즐길 수 있으며(감성적 공유), 딱 2월 12일이라는 특정일에 큰 의미를 가지는(시의성 확보) 행사. 가장 적합하다 싶었다.


썩 마음에 든 행사를 찾아내 준 GPT에게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건네고 회동 구성원들에게 전달했다. 다들 마음에 들어 했기에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정월 대보름을 앞둔 전 주 금요일 밤, 부럼 세트를 몇 가지 찾아 투표를 올렸고,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은 땅콩 조금+호두 한 알의 오색 사각 주머니가 채택되었다. 대보름을 하루 앞두고 부럼은 무사히 도착해 딱 2월 12일, 우리는 부럼 깨기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원래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침 일찍 깨야하고, 어금니를 사용해 한 번에 깨야 하며, 처음으로 깬 부럼은 마당이나 지붕에 던지고 두 번째 것부터 먹어야 한다 등등. 명확히 지킨 건 두 번째밖에 없긴 했다. 아침 일찍 모이기에 우리의 출근 시간은 9시 혹은 9시 30분이었고, 심지어 오늘부터 행사(업무다.)가 들어가서 아침의 바쁨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불가피하게 점심 식사 후 라운지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건 불가피했는데, 세 번 째는 부럼을 깬 4명 모두 까먹어서 못했다. 다들 깔끔하게 부럼을 깨었고, 맛있게 먹었으니 된 것이 아닐지.


수다를 떨며 부럼 깨기를 즐겼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부럼을 깨며 인스타그램 계정 아이디를 고안했고, 접전의 투표 끝에 최종 아이디가 결정되었다. 그냥 편하게 나이순으로 돌아가면서 공식 게시물을 작성하기로 했는데, 저녁까지 같이 먹은 터라(이 때도 즐거웠는데, 특별하기보다는 평범했던 대화였다.) 시간이 꽤 촉박했을 텐데도 첫 번째 주자가 매우 MZ 스러우면서도 알찬 게시물을 작성했다. 힘써 준 덕에 2월 12일이 지나기 전, 그러니 정월 대보름 당일로 날짜가 찍힌 게시물을 남길 수 있었다. 알차게 노래까지 달았는데,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라고 일단 설명하고 시작하는 노래라 굉장히 직관적이었다. 표지도 아주 강렬에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이 모든 건 나의 지겨움에서 시작된 건데, 어쩐지 나보다 다들 즐거워하고 본격적인 모습이라 오랜만에 몽글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달 회동도 어느 정도 미리 구상을 해두었으니, 부디 사이가 틀어지지 않고 오래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런 소소한 이벤트가 있으면 버텨나갈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내일도 행복한 일이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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