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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함께 춤을

내가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법

by 필연

언젠가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감정을 경험한다. 기쁨, 분노, 슬픔, 질투, 속상함 등. 어떤 감정이 좋은 것인지 나에게 묻는다면 감히 확언할 수 없다. 나는 감정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영영 모를지도 모른다. 감정은 배우고 익히면 능숙하게 구별할 수 있는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그것들은 개념보다는 서술적이며, 표상에 가까운 어휘다.


그렇다면 슬픔은 정말 좋은 않은 감정일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단호하게 반대의 표를 던진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밝고 쾌활하며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를 그러한 고명도의 사람으로 바라봐 준다는 건 분명 대단히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애석하게도, 스스로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온전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신으로부터 세상의 빛을 감각할 생명력을 부여받은 대가로,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는 저주를 함께 받은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음지에 가까운 사람이다. 내 삶은 대개 기쁨과 환희보다는 슬픔이라는 정서에 더 근접하게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이는 ‘그래서 나는 기쁨이 싫고 슬픔을 좋아한다.’라는 이분법적인 가치 판단이 아니다. 슬픔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저 친숙하고 담백하다고 느낄 뿐이다. 그리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들의 슬픔이라는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언제부터 슬픔이 나에게 이토록 편안한 감정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학문적으로 슬픔은 상실을 통해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많은 상실을 경험했던 것일까. 나는 지금껏 무엇과 이별해 왔으며, 어떤 연유로 좌절과 실망이 내 안에 차츰 스며들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은 무심하게도 흘러가고, 내가 문득 차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어둠이 질펀하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슬픔의 영토에는 뚜렷한 국경이 없다. 어디까지가 그들의 땅일까. 나는 온전한 슬픔의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나는 종종 운다. 아니, 종종이라는 표현보다 조금 더 가뿐하게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내 주위 사람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나는 흘린 만큼, 흘려본 만큼, 내 눈물의 발원지와 습성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울지 않는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우는 것은 나약함의 표출이며, 울지 않으려면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길러야 했다. 감정의 풍파에도 꼿꼿이 무던해야 했다. 허나, 흔들리라고 불어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들꽃이 어디 있고, 꺾이지 않겠다는 다짐에도 꺾이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을까.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 없는 사람만 있을 뿐, 꺾이지 않는 나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느낀다. 누군가의 눈꺼풀이 열리고 닫히는 그 틈에서야 비로소 내가 울어도 되는 시간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내가 강한 줄 알고, 모든 슬픔을 이겨내는 낙관적인 사람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눈동자에 담긴 슬픔이, 속눈썹에 맺힌 슬픔이 타인의 눈동자에 비치고, 타인의 속눈썹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 견딜 수가 없다. 혹여 내 눈물이 누군가의 마음에 얼음 결정처럼 날카롭게 내려앉아 그들의 피부에 생채기를 낼까봐, 나는 조심스럽고 또 염려한다.


나는 눈물이 많았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생명의 신호이다. 울지 않는 아기는 숨길이 막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울지 않기를 강요받는다. 심지어 남자는 평생 단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까지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 아마도 강인한 남성상을 요구하던 시대적 산물일 테지만, 나는 슬퍼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흐르겠다고 떨어지는 눈물을 막지 말라고.


슬픔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충돌하며,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부딪히고 강한 힘으로 움켜잡히는 우리 마음은 점차 산이된다. 그 산은 차갑다. 손길도 발길도 닿지 않는 곳에 소복이 쌓인 눈처럼 녹지 않는다. 만년설이다. 그러다 산봉우리가 점점 높아지다가, 폐를 지나고 기도를 지나 눈까지 차오르면, 더는 오를 곳이 없어져 결국 빛을 받아 녹아내린다. 그리고 물처럼 흘러내린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쌓인 슬픔의 산을 바라보며, 그 위에 조용히 빛을 비추는 사람. 얼어붙은 마음이 언젠가 스스로 녹아 흐를 수 있도록. 나는 언어적 공감 표현도, 등을 두드려주는 위로의 몸짓도 어색하다. 다만, 하얗게 쌓인 눈이 언젠가 녹아내릴 수 있도록, 묵묵히 곁에서 빛을 비추고 싶다. 산이 낮아져야 또 눈이 쌓인다.


새로운 슬픔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슬픔은 거부한다고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저 조용히 내려앉을 뿐. 그러니 우리는 그 감정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 주면 된다. 그리고 그 곁에서 다시 빛을 비추면 된다. 언젠가 녹아내릴 수 있도록.



나는 슬픔에 친숙하다. 잘 알진 못하지만, 어색하지 않다. 나는 슬퍼하지 않는 방법은 몰라도 슬픔과 함께 지내는 방법은 안다. 맘껏 울고,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며 나도 빛을 얻는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것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고요한 역동 행위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나는 슬퍼하고, 무수히 울 것이다. 그러나 내 슬픔을 알아봐 달라는 게 아니다. 눈물을 닦아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이런 사람이니, 이런 나를 보고 불편해하거나 놀라지 않길 바란다. 일종의 고백이며, 선전포고이다. 나는 슬픔과 친하고 내 눈물은 내가 잘 닦을 줄 안다. 그러니 슬픔이 찾아와도 걱정할 것 없다. 머무는 시간 동안 함께 지내다가, 흐르면 그저 흘러 보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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