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록 익어가는 나의 삶
책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읽는 행위를 좋아하는 걸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 책과 함께 보내는 모든 시간이 고요하고 평안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여갈수록 나의 지층은 단단해지며, 나는 나로서 더욱 충만해지고 있음을 분명히 감지했다.
고고학의 발전을 위해 화석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생명이 없듯, 나도 어떠한 결연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독서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왜 책을 좋아하냐는 물음을 받을 때마다, 그 답을 하는 것이 늘 어려웠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당신은 음식을 먹나요?”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먹는 것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소화 기능이 좋든, 나이가 많든 적든, 그 어떤 조건의 사람이든 간에 먹는 행위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다. ‘식’ 행위를 좋아하느냐는 그 이후의 문제다.
좋아하다 보면 많이 먹게 된다. 이는 곧 자신의 취향을 더 잘 알아갈 기회가 많았다는 뜻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문화이자 의미가 되었다. 나도 그렇다. 어릴 때부터 책을 끼고 살았던 책벌레는 아니었지만, 한 권이든 두 권이든, 읽어야 했기에 책을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읽다 보니 그저 좋아졌고, 그 마음은 지금까지 일상 그 자체가 되었다. 물론, 단순히 만남의 빈도가 마음을 들뜨게 만든 유일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 간의 관계도 그렇지 않은가. 자주 만난다고 해서 반드시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 만남 속에서 긍정적인 무언가를 발견했기에 좋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한 ‘읽다’라는 반복적인 행위가 그들의 반복적인 물음 덕분에 훈연되듯 배이고 입혀져 나에게 의미가 되었다. 이는 마치 한 인간이 깨우침을 얻고자, 고요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행하는 은밀한 의식과 같았으며, 나 자신과의 내밀한 교감적 치유였으리라. 마치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순례길을 떠나는 신자의 신심 행위처럼, 나 역시 나의 삶을 찾기 위해 기꺼이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의 시작은 각기 다양하다. 순례를 위해 지구 반대편, 아주 먼 땅으로 떠나는 이들을 종종 보았기에 이 용어가 낯설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순례의 진정한 의미와 결연한 마음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각자의 사연을 품고 일상을 내려놓은 채, 어떠한 해답을 얻고자 떠난다. 나는 종교도 없고,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 내가 짊어진 사회적 책임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수많은 유·무형적 보상을 내려놓을 용기도 없다. 순례자들은 어떤 계기로, 또 무엇을 얻고자 여생의 일부를 그 길에 할애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가고자 했기에 간 것일까, 아니면 가야만 했기에 그곳으로 향했을까? 나는 질문자의 역할을 감히 순례자들에게 취해본다.
앞서 말한 내가 순례길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곧 내가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의지할 종교가 없기에, 내 삶이 막막하거나 끝없는 도전과제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패배를 인정하고 싶어질 때면 책을 찾았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내가 약한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사안이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게 맞을까.’ 얕게는 문제 자체를 해결하고자 책을 들었고, 더 깊게는 문제를 해결하는 나 자신을 위해 책 앞에서 하루하루 반성하고 참회하고 기도했다.
아울러 나는 아직 삶의 기로에서 어느 쪽을 당차게 선택할 용기가 없다. 이는 곧, 가진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팔을 뻗기에는 여전히 주저함과 걱정이 많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이런 나의 대범하지 못함이 답답할 때도 있다. 그러나 선택에 있어 완벽이란 것은 없다. 무엇을 얻을 것인지, 가지지 못할 것들보다 그것이 과연 적당한 만족감을 줄지에 대하여 결과를 알지 못한 채 결단을 내리기는 여전히 내게 어렵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선택 후에 승패를 점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얻을지를 확고히 정하고, 얻지 못할 무언가에 미련을 두지 않는 굳센 의지일 것이다. 이를 깨우치기 위해 누군가는 순례길을 떠나고, 나는 책으로 향한다.
배움에는 정도(正道)가 없다는 말이, 살아가는 데 있어 안도가 된다. 누군가는 더디게, 누군가는 빠르게 알아갈 것이다. 혼자서 익히거나,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배우는 등 형태는 다양하겠지만, 결국 모든 길이 귀결되는 지점은 ‘우리가 무엇을 깨달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고자 했음’에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속박된 삶의 관성에서 용감히 벗어나고, 또 다른 이는 그 무게를 담담히 받아들이기를 택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어쩌면 한참 후에 내 인생을 되돌아본다면 참 싱거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티아고를 횡단하는 어느 순례자의 고단한 한걸음처럼, 나도 책의 광활함 속에서 묵직한 활자 하나하나를 깊이 묵상하며 내디딘다.
순례자들은 구름 한 점에도, 흔들리는 꽃잎 한 장에도 온몸이 진동하듯 강렬한 울림을 느낀다. 또 다른 순례자를 만나 노래하고, 서로의 신발 끈을 고쳐 매주며 함께 나아갔을 것이다. 나도 순례자의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무엇을 얻기 위해 읽지는 않는다. 세상을 감각하기 위해, 함께 나아가기 위해, 그리고 이 길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욕망 없이 자족하며, 현재에 감사하고, 삶이 무상하더라도 그저 진실로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