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살아내는 법, 찰나를 온전히 감각하기
‘영원’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갑자기 ‘영원’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영원?”
영원한 사랑, 영원한 인연, 영원한 행복.
아마 인간만큼 영원이라는 개념을 사랑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이런 단어는 아마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영원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물론,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약 영원이 존재한다고 해도, 나는 그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유한하므로 불멸의 생을 살아갈 수 없고, 무한한 그것의 생에서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토록 영원을 희구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다. 아마도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순진무구한 동경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원은 언제 불리어지는가?
우리는 대개 기대하는 것이 끝이 없길 바랄 때, 영원을 불러들인다. 너무 사랑하기에 그 사랑이 영원하길 바란다. 소중한 인연이 끝나지 않기를 기도한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여,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반대로, 어떤 것의 끝을 목격했을 때 영원이라는 단어가 필요해진다. 사랑이 끝난 후,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갈망한다. 인연이 끊어졌을 때, 우리는 다시 영원한 인연을 기다린다. 현재가 불행스럽기에 언젠가 도래할 영원한 행복을 소망한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단어는 내일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것에서 비롯되기에, 어쩌면 지나치게 낙관적인 용어일지도 모른다.
영원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것을 이해하려 할 때, 그 극단에 놓인 것들을 대비하여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렇다면, 영원의 반대는 무엇일까? 영원은 무한함이기에, 그 반대는 아마 유한함일 것이다. 또한, 영원이란 평평하게 펼쳐진 넓은 공간처럼 보이는데, 그 극단은 찰나가 될 것이다.
생의 유한함은 곧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한 인간은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그 두 지점 사이의 선분의 길이만큼 살아간다. 물론 그 길이가 각기 다르지만, 그 길이가 유한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반면, 영원은 인간의 태어남 이전부터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무한한 직선의 길이가 된다. 그래서 영원 앞에서 우리는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그 영원을 마주하면 우리는 겸손해진다.
찰나는 곧 지금 이 순간이다.
불교 경전에서는 찰나를 명주실 한 올이 끊어지는 순간의 64분의 1(0.0013초)이라 정의한다. 찰나는 부지불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이다. 우리가 헤아리기엔 초월적인 개념에 가까워, 찰나는 우리 감각을 넘어서는 시간이다. 찰나도, 영원도 모두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야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찰나 속에 존재해야만 영원을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찰나에서 찰나를 이어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흔히 이야기하는 ‘찰나 속의 영원’이란 찰나라는 작은 점들이 모여 영원이란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제야 그 의미가 보인다. 우리는 찰나의 선택에 의해 인생의 기로가 바뀌었고, 찰나의 시선 속에서 사랑이 시작되었으며, 찰나의 숨결로 우린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찰나 속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은 영원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순간을 스쳐 보내지 않고,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순간을 온전히 바라보고, 최대한 감각에 집중하며 사유하려 한다. 깊이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찰나를 온전히 감각하는 법이다. 내가 기억하는 찰나가 있다. 후암동 골목에서, 한 줌의 빛이 회색 담장을 감싸며 새싹을 보듬는 장면을 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 매료되어,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성스러운 빛의 부화 장면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영원 속에 우리가 있다.
문득 이런 생각에 잠긴다. 영원이라는 무한한 길 위에 우연히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는 사랑을 품고, 행복을 안고, 때로는 인연을 가슴에 새기며, 그 모든 것을 영원한 대지에 씨앗처럼 뿌린다. 끝난 모든 것을 영원의 땅 속에 묻고, 그 흙을 포근히 덮어둔다. 우리는 모두 유한하다. 존재의 유한함은 결국 죽음 앞에서 나약해진다. 하지만 그 죽음을 덮고, 생 이후의 시간을 기도하며, 우리는 여전히 영원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