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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 인연 : 시절의 교차점에서

만남과 헤어짐에 대하여

by 필연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대개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왠지 선하고 부드러운 결이 되었음이 느낄 때, 바로 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다. 현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혹은 과거를 회상할 때, 인연이라는 단어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마 나의 인연일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긍정적인 감정이 절로 생기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인연’이라 느낀다. 반대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사람도 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악연’이 될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악연을 지긋지긋하고 떼어낼 수 없는 인연이라 한다면, 악연 또한 인연이라는 집합의 원소일 뿐이다. 물론, 돌연변이 같은 원소가 썩 내키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인연이 모(母) 집합이라면, 어머니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그보다 더 이성적이고 직관적이다. 불교에서는 ‘인’을 결과를 낳기 위한 직접적 원인으로, ‘연’은 그 ‘인’을 돕는 외적인 간접적 원인으로 해석한다. 지금껏 나는 인연을 단순히 사람과의 연줄이라고만 이해했기에, 이 깨우침은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인연’이라는 말에 울고 힘들어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안에서 ‘뻥’하고 뚫린 듯 시원한 개방감이 느껴졌다. 인연은 단지 좋고 나쁜 것으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었으며, 그 자체로 ‘인’이라는 중심으로 수많은 ‘연’들이 작용한 결과였음을 알게 되었다.


마치, 거무죽죽 흐린 먹구름이 가득 찬 하늘에서 조금씩 구름이 걷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본래 하늘은 단지 낮과 밤의 끝없는 순환만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늘 위를 떠도는 구름, 비, 눈을 빌미로 하루를 좋고 나쁨으로 단정 짓곤 했으며, 우리의 기분과 태도조차도 자연스레 그 평가에 휩쓸려버리지 않았는가. 나 역시 인간관계를 단순한 좋고 나쁨의 틀에 수만 번 가두어왔음에 탄식했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 사람과 만났고, 그 시절, 그곳에서 이어졌다. 지금은 그 인연이 끊어졌을 뿐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좋은 인연으로 만난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시점까지는 무탈했기에 이어졌을 뿐이다. 애초에 나쁜 인연으로 만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느 시점, 어떤 이유로 이어지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이어지거나 혹은 끝이 났던 그 이유는 그저 내가 이 인연 속에서 마주한 수많은 상황들에 대한 나의 감정(鑑定)의 결과였을 뿐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인연은 애틋함으로 불붙어 따뜻하기도 하고, 냉담하기도 하며, 온 세상이 충만해질 때도 있지만, 때로는 세상에 남는 것 하나 없이 비루하고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모든 인연은 ‘시절인연’ 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섭리처럼 시절이 떠오르고 저물어감에 따라 인연도 피고 지는 법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인연들을 만난다. 그중 일부는 인연이라고 생각지도 못할 만큼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내가 만난 모든 인연을 다 풀어낼 수는 없다. 사실, 기억이 다 나지도 않기에 풀어낼 수 없다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그 시절 그 자리에서 더는 움직이지 않고 놓아둔 인연들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첫 우정이라 생각한 인연도 끝이 났고 첫사랑이라 부여했던 인연도 끝이 났다. 각 인연과의 끝이 난 내막은 모두 다르지만, 분명한 교집합 하나가 있다. 두 인연 모두 내가 홀로 온전히 감당하기 힘들든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랬기에 그 인연들이 끝났겠지만 말이다.


첫사랑은 누구나 설렘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끝이 날 즈음, 그 어느 순간에 더는 이어지지 못할 어느 한 시련을 겪게 되었기에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첫사랑도 그랬다. 시작은 마냥 행복했고,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으나, 그 사이 여러 가지 상황들이 그 관계의 시련이 되었다. 황홀했던 마음은 부딪히고 상처받으며 점차 조금씩 내려가다가 결국 그 끝,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렇게 그 인연은 추진력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 앉았다.


나중에야 인연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과거를 되돌아보면, 그 관계 속에서 잘못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나는 미숙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으며, 그 사람 역시 그 시절,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사람의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당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나이에는 여러 번의 실패와 아픔을 겪으면서 사람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과 상황을 모두 품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나를 더 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비참함을 그때서야 느꼈다. 그 시절 내가 배운 것은, 결국 사람은 하나를 내려놓는 용기와 또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평생의 과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시절, 인연과 진로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 사람을 원망했었다. 왜 나를 좋아한다면서 그 끈을 놓아버렸을까. 나는 그의 우선순위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사람의 연락을 통해 다시 한번 인연의 끈이 나풀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이루고 싶었던 꿈을 결국 성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좋아했던 그 시절 동안, 나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가 건넨 인연의 끝을 잡지 않기로 했다. 그 끈의 끝은 매번 엇갈려 한쪽만 잡고 있었기에,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채 멀어졌다. 지금 그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 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그 사람이라면, 지금도 자신의 길을 신념대로 선택하며 잘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는다.




어떤 인연은 나를 참 쓰라리게 만들었고, 또 어떤 인연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겹고 벅차게 만들었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절에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떠오르는 감정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인연들에 대해 오히려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움직이지 않던, 잡을 수 없었던 인연이 있다는 것을 몸소 알게 해 준 사람들. 그 시간 동안 나는 아팠지만, 그 아픔을 일으킨 건 분명히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이유, 즉 ‘연’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를 아프게 했다고 해도, 그 의도가 나를 상처 입히기 위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끝을 결정지은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인연은 내 손과 어깨를 잡고, 두 팔을 벌려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던 그 품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참 다행인 것이다.


그렇게 내가 만난 모든 인연은 결국 나에게 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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