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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기 위해, 아무것도 놓지 않았다

여백을 지켜내기 위해 놓아두는 태도

by 필연

살다 보니,

삶을 대단히 거창한 것들로 채우는 일보다

여백을 고상하게 가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게 채워 넣는 일보다

비워내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웠다.


사소하게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 와 새 가구를 들일까 고민하는 순간에도,

무엇을 더 채워 넣을지 고민하는 일보다

남는 공간을 휑하지 않게,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기 위한 생각이

더 울렁거리곤 했다.

일상의 틈 사이,

온전히 쉬어감의 단조로움을 견디는 일은

열정적인 무언가를 채워 넣는 일보다 더 어려웠다.


그만큼 무너지기도 쉬웠고,

그 틈은 나를 지탱하는

조용하고 건실한 무언가로 작용했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도

그 작용은 희한하리만큼 닮아있었다.

가까워지고 싶어서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 했던 그 노력은

얼마 가지 않아 곧장 척력이 되어

우리는 서로로부터 튕겨 떨어졌다.


오히려 멀리 있어도,

보이지 않더라도,

편안한 공기처럼 환기되는 그런 관계가

더 건강했다.


내 목소리의 진폭이 커질수록,

진동수가 높아질수록,

이 공간은 물론 가득 채워졌겠지만,

나는 적막의 수줍음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나의 소박한 바람이었고,

그 하나가 공간 사이로

‘훅’하고 튀어 오르던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진심으로 가까웠다는 방증이었다.

‘좋아해.’,‘사랑해’,‘늘 곁에 있을게.’

그런 멋들어지고 낭만적인 말들보다

늘 나를 향해 있는 눈빛 하나가

나에게는 더 확실한 고백이었다.

묵묵히 곁에 머물던 그 사람의 그림자는

어떤 말보다 내게 더 따스한 위안이 되었다.


마음 역시,

무언가를 욕망함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비워내는 데 더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했다.

‘가득 참’의 밀도를 견디는 것보다

‘비워냄’ 이후의 마음이 쪼그라들지 않도록

그 원형을 지켜내는 일이

더 세밀한 애씀이었다.

누군가와의 추억도,

지나간 어떤 후회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떤 걱정도

떠올리는 일보다

지우는 일이 더 어려웠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

기억의 문 앞에 선 야심한 밤,

보초병이 되어 지키던 시간은

참 늘어질 만큼 길었고,

참으로 피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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