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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흘러가다 멈춰진 길목에서

평범하다 ㅣ 우리는 모두 잘 흐르고 있음

by 필연

양재천을 걷다가 ‘나 지금 행복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별일 없이 무탈한 하루가 감사했다. 그간의 평범함이 실은 기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거창한 여행보다 소박한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는 걸, 다시금 확신했다. 목적지도, 기한도 없는 이 자유로움은 참으로 편안했다.


사회인이 된다는 건, 매일 시간에 쫓기며,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모나지 않게 살아야 하고, 또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내 발로 형틀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행위는 반복된다고 해서 숙련되지 않는다. 결코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다만, 이 불편함에 점차 무감각해질 뿐이다. 틀에 맞춰 다듬어지는 나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쉬는 날이면 어딘가를 향해 나선다. ‘어딘가’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날의 날씨, 체력, 기분에 따라 향하는 곳이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선지는 늘 미지수로 남겨둔다.

가끔은 내가 정녕 내향인이 맞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조금 다른 이야기다. 나는 원체 걷는 걸 잘하는 사람이고, 햇살을 필요한 사람이며, 살랑대는 바람의 간질거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렇다. 그래서 나를 다시 밀고 나갈 삶의 건강을 얻기 위해, 탁해진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려고 걷는다.


어쩌면 나는 그저 걸을 수밖에 없는 뚜벅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그렇게 명확히 따지는 게 꼭 필요할까? 우리는 살아가며 늘 명확함을 요구받지만, 사실 삶은 언제나 ‘어쩌다 보니’ 벌어진 것들이지 않았던가.

만약 인생이 수학이나 과학처럼 딱 떨어지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마음 아플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계산만 잘하면 되는 삶이었다면, 그저 진득하게 머리 싸매고 앉아 있으면 됐을 테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 과정을 취하면서도, 마음 한편은 시큰거려 가슴을 부여잡게 된다. 변수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변수에 무엇을 대입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기에.


삶이 자꾸 꼬이는 것만 같을 때, 혹은 딱히 꼬이지 않았더라도 무언가 떡하니 앞을 막고 있는 느낌이 들 때, 그 모든 순간이 힘들게 느껴지던 건 결국 ‘흐르지 못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대하던 바람은 순탄히 이루어지지 못했고, 사람과의 관계도 생각만큼 풀리지 않았다.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은 단 하나, ‘잘’ 흘러가는 것이었다. 그 ‘잘’이라는 단어 하나를 붙이기 위해, 이렇게 아파하고, 숨이 벅차오르나 보다. 양재천의 물결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둑을 걷다가 이름표가 붙어있는 나무들을 보았다. 감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이 정도만 보았더라면 ‘생태학습공간이구나’ 했을 테지만, 그 위에는 누군가 네임펜으로 적어둔 글자들이 더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았다. ‘심은 사람’, ‘심은 날짜’, 그리고 ‘하고 싶은 말’.

1999년에 심어진 나무들엔 사람들의 염원이 약 27년간 고요히 품어져 있었다.

하나하나 찬찬히 읽고 싶어졌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에는 어떤 바람이 있었는지, 어떤 고민들을 품고 있었는지, 각자의 삶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 우리 가족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주세요.’

‘우리 아들 유치원 입학을 축하한다.’

‘아프지 말고 잘 지내기’

‘명복을 빌며’


불행인지 다행인지, 참으로 평범한 소망들이었다. 제삼자의 시각으로 보았으니 당연히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바람들을 내 삶에 투영해 보니, 그 평범함조차 참 어렵고 어지러운 것들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어떤 생각 하나가 빠르게 강타하고 스쳐갔다.

우리는 결국 ‘잘’ 살고 싶은 존재들이라는 것.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겹들을 걷어내고, 나를 비추기 위해 켜두었던 수많은 조명들을 꺼버리면, 남는 건 그저 ‘나’ 하나뿐이다.

이 원형이 참이라면, 부유함도 가난도, 잘남도 못남도, 건강도 병도, 그 모든 구분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잘 살고 싶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돈이 많고 적음, 배움이 길고 짧음, 그 어떤 자격이나 자질도 ‘잘 사는 삶’의 필요조건이 되지 못한다.

살아가며 어떤 경험을 만들고, 어떤 배움을 빌려오며, 또 어떤 철학을 인용해 올 것인지. 그 숙고의 과정들이 모여 하나의 삶이 된다.

그간의 무수한 시도와 도전, 감내했던 수만의 실패와 좌절감들은 인생 속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전환점은 우리가 써 내려가는 글의 또 한 단락이 된다.

실제 글에도 문단이 바뀌면 한 칸 들여 쓰기를 하듯, 우리의 삶도 방향이 달라질 땐, 떠올려야 한다.

‘문단이 바뀌어야 하는 시점임을.’


지금 나는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다. 하나둘 느꼈던 감상을 이렇게 써 내려가는 중이다.

다시 읽어보니 참 두서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두서가 없다’라고도 적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오늘의 글과 가장 어울리는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것 하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며, 매만지고, 느끼고, 흩어진 삶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모아 적어 내려가는 것.


그게 오늘 나의 글이고, 내 인생의 한 문단을 써 내려가기 위해 기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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