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어쩌면 또 오해하겠지만,

'오만과 편견' 그리고 나의 '비틀림과 왜곡'

by 필연
‘우리는 우리의 관념과 편견으로 가득 차있다. 아무리 공정하게 생각한다 해도 결국 그것 역시 주관적인 견해였다.’
- <오만과 편견> 중에서


오만은 스스로를 높이고 타인을 낮추는, 일종의 건방지거나 거만한 태도다. 편견은 불완전한 정보로 인해 생긴,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판단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한평생 오해하고, 또 오해받을 것이다.

오해는 결국 해석의 어긋난 결과로 빚어진 것이며, 해석이란 어떠한 현상이나 표현이 지닌 의미를 추출해 내기 위한 필연적 사고 과정이다. 그렇다면 오해란, 결국 뇌의 작용이다. 우리가 머리를 통해 사고한 객관적 판단이라 믿는 모든 것 역시, 실은 나의 해석을 거쳐 탄생한 오해일 수 있다.

최근 MBTI가 유행하면서, 이성과 감성 사이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일각에선 어떤 성향이 더 좋고 더 우월한지를 가르려 하고, 마치 문학적 허용처럼 머리는 이성, 가슴은 감성의 영역이라 구분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고의 출발은 결국 ‘뇌’, 즉 머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성적 접근이든, 감성적 접근이든, 누군가를 이해하는 그 모든 과정은 ‘나의 뇌’가 해석한 결과일 텐데, 그렇다면, 그 해석은 실제에 얼마나 가까울 수 있을까?


요즘 나는 이 물음 주변에서 자주 헤매고는 한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존재함으로써 ‘나’ 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결국 사회 속에서 관찰된 나의 일부일 것이다. 혹은 누군가의 시험성적서나 감상평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서로를 관찰하고, 또 관찰당하면서 인류학 연구 실험 속 피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문득 섬뜩해지기도 한다.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작품 <오만과 편견>은, 자기 인식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 그리고 그릇된 사고 과정을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풀어낸다. 이 작품이 단지 신분 상승과 결혼으로만 끝났다면, 나는 지금껏 이토록 반복해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들은 무도회장에서 처음 마주쳤고, 그 자리에서 서로를 오해했다. ‘다아시(매튜 맥퍼딘)’는 자신의 출신과 그로 인해 부여받은 높은 사회적 지위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인물로 비친다. 반면,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는 특출 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사랑 없는 결혼에 의미를 두지 않는 당당하고 소신을 가진 사람이다. 다아시는 오만했고, 엘리자베스는 편향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를 미워할 수 있었고, 그 관계는 결코 발전하지 않으리라는 정당성 또한 전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강의 수류와도 같다. 사랑은 불현듯 홀씨처럼 자리 잡는다. 나도 모른 새에 커져가는 마음이라, 뽑겠다는 결심을 품었을 땐 이미 그 마음은 장성해져 버린 후로, 도저히 손쓸 수 없게 된다. 그들의 감정 역시 그렇게 자라났고, 그 사랑은 결국 사회적 장애와 내면의 불편함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무수한 갈등의 정점마다 그들의 사랑은 더욱 공고해지고 뚜렷해졌으며, 결국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나 용기를 잉태하였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그래서인지 더욱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아시의 오만이나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잘못되었으니 ‘나는 오만과 편견 없이 누군가를 바라보겠다’는 다짐을 새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건 어느 정도 지향점 혹은 방향으로 비칠 수는 있어도, 현실 속에서 나의 판단에 있어 한치의 오류와 결점 없이 누구의 존재, 그 자체만을 바라보겠다는 것을 지켜내리란 애당초 어려운 다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안 하는 거야’, ‘아니, 못하는 거야’ 같은 솔직함을 빙자한 자기 합리화를 던져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과 지각이 모여 도출된 인식의 결론이 반드시 진실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 혹은 조심스러운 변명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내고 싶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처음으로 오해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그 사람을 내 방식대로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와 멀어지기로 결심했을 때, 어쩌면 나는 그 사람과의 풀리지 않을 오해를 지독히 단단하게 엮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 나는 오해하기로 했다. 아니, 오해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오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마저 몰랐을 때에만 가능했을 일이었을 테니깐.


어쩌면 우리는 모두 오해 속에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좋고 나쁨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그 오해로 인해 한 관계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오해해서 미안하다”라고 고백할 때, 따지고 보면 내가 오해를 하고 말고의 문제보다 그 오해가 그 사람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가졌기 때문에 사과했던 것 아닌가.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한 오해는 굳이 사과하지 않았다는 기억이 내 안에 은근하게 남아있다.

이 글을 써 내려가는 이 순간조차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그 안의 가치들, 그리고 나 자신의 시선 및 관점 또한 오해가 낳은 또 하나의 오해, 그 연결지점 어딘가 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어쩌면 또 오해하겠지만,

그 오해가 당신의 아픔이 되지 않도록

당신의 다정함과 당신의 열정을 조금 더 깊이 오해해 보겠노라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