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 물들어 버린 순간
나에게 비 내리는 주말은 제법 나쁘지 않다.
비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어쩌면 비를 담아내는 한 폭의 차창 앞을 지키는 일을 좋아하는 편에 가깝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토닥거리는 빗방울에 세상은 곧장 잠에 든다.
피로받은 세상은 잠투정하는 아이마냥 간혹 흐느끼곤 하여, 하늘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비를 내리는 건 아닐까 했다. 빛은 늘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와 드러난 계곡만을 찾아갔으니, 빛에서 소외된, 아주 깊이 잠식된 이웃들을 위해 하늘은 자비를 베풀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선행을 한참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하나둘 우산을 펴기 시작한다. 형형색색 세상은 다채로워졌다. 만개한 꽃밭인 양 보였다.
우산이 없는 사람은 처마 아래로 몸을 숨겼다. ‘비가 언제 그칠 줄 알고, 저곳엔 얼마나 숨어 계실 생각이실까,’ 마치 술래가 없는 줄도 모르고 시작한 술래잡기였다.
또 어떤 이는 우산 든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었다. 축 처진 가장의 어깨도, 고운 연인의 어깨도, 가냘픈 친구의 어깨도 그 순간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지붕이자 처마였다. 멀어지고 서먹해진 우리의 관계는 덕분에 긴밀해지고 또 밀착된다. 어쩌면, 비는 천진하고 수줍던 사랑의 오랜 정령이었을까.
나는 비의 기척을 한참을 들었다. 비는 나를 자꾸만 깨웠다.
피고 지고 - 떠오르고 저물고 - 살아가다 죽음 앞에 가까워지는 모든 존재는 아무도 모른 새 나지막이 묻어나는데, 비는 늘 그렇게 티를 낸다. 자신을 들어달라는 어슴푸레한 수신호 같았다.
자꾸 앞서 도망가고 조급해지는 내 마음의 음률을 비의 리듬에 잠시 맞춰보기로 했다.
삶이 변주되어 간다. 느긋하게 진전되는 구간이 절실했던 참이었다.
비에게 오늘의 악장을 조금 더 내어주기로 했다. 그 순간, 나는 조금 더 고요해지고 조금 물러져도 되겠다고 즉감했다. 참으로 평화로웠다.
나는 비의 배경이 되었다. 내 삶의 주연에서 물러나, 욕심 없이 가든하게 가만히 머무르는 일이 참 아늑했다.
비 내음이 온 세상에 가득 차니, 모든 이물은 대지로 떨구어졌다. 덕분에 대기는 한층 선명하고 순박해졌다.
종일 비가 추적거린다. 세상은 촉촉해졌고, 물기를 머금은 나는 조금씩 짙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