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 괴로운 상황이었을까, 괴로워하는 마음이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고민이 은은히 풍기는 분위기는 분명 유쾌하지 않다는 데 반박의 여지는 없지만, 그 태생이 불온하고 나쁜 것이라고 단정하는 판단, 그 자체가 오히려 더 불쾌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이 우중충한 내음을 끝없이 맡고 느끼고자 애쓴다는 뜻으로 이 글을 적어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것이 병으로 심화되기 이전까지는, 고민이라는 존재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죄가 없음을 입증하려는 피고의 변호인으로서, 나는 지금 법정 위에 서 있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아도 될지에 대한 청유스러운 질문을 건넨다. 며칠 전에도 회사 동료 한분이 본인의 고민 보따리를 함께 풀어줄 수 있는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어떤 어려움이며 얼마만큼의 답답함인지 여기에 풀어놓기엔 너무도 개인적인 일이라 함구하려 하지만, ‘마음의 힘듦과 때로는 우울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내게 던졌다는 사실은, 이 글에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다.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타인에게 자신의 어두움을 드러내기까지, 그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지를 떠올리면, 비교적 나는 한결 편안하고 수월한 입장에 놓여있는 셈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가장 연약해지고 속이 무상해진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 순간, 내 입을 거쳐 나오는 여러 문장과 비언어적 반응들이 그에게 꽤 깊이 흡수되어 그 안에 채워질 수도 있다는, 다소 오만하고 과대한 책임감에 나 또한 무거워진다.
분명 그 고민의 보따리는 내 것이 아닌데, 그 보자기의 매듭 끝자락을 내가 잡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따라 그이도 다칠까 염려된다.
매듭이 어떤 식으로 묶여 있는지를 고심하여, 더디더라도 여리게 손수 풀어내는 방법도 있지만, 때로는 매듭을 댕강 잘라내야 할 수도 있고, 간혹 보자기 자체를 찢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늘 골똘했고, 내 머리는 생각의 생식력도 꽤나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그 생각들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 내 안에 굴을 아주 깊이 파두었다.
이제는 생각의 그림자인 우울과 눅눅한 슬픔마저 너무 익숙해져 있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니-물론, 나처럼 굴을 파보자고 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그것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볼지를 판단하는 일, 그 판단조치 때로는 어려운 고민이 된다.
그래, 나는 이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삶의 모든 순간은 고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고민은 특정 누구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살아가는 동안엔 고민스러움의 연속 위에 서 있다는 것.
“너만 힘든 게 아니야”가 아니라 “너도 힘들구나”로 이해해 주는 것,
그것이 공감이고, 우리가 연대하는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전하고 싶은 게 있다.
이 고민들 속에서 사실이고 진실인 것은 ‘상황’ 그 자체일 뿐이다.
그것이 힘들 수는 있어도 허망하고 무가치하며 불행한 것인지는, 결국 내가 내린 주관적인 판정이며, 내가 집필한 소설의 결말 정도에 불과하다.
대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답이 없어서 힘들었던 게 아니다.
답이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어려웠고,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게 아니라, 이 길을 가도 될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수년간 고대하던 간호사의 직업을, 반년 만에 치를 떨며 병원을 도망쳐 나왔던 그 시절은 분명히 일어난 일이지만, 그 시절의 내가 불행하고 실패한 사람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 시간 덕분에 나는 지금 더 잘할 수 있는 직무와 더 큰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피어내고 있으니, 감사한 경험이다.
학창 시절, 소위 ‘왕따’라고 불리던 그 시기의 나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시절 속에서 인연의 소중함과 내 곁에 머문 진실한 인연들을 알 수 있었다.
대학생 시절, 남들이 하나쯤 떠올릴만한 흔한 술자리도, 동아리 활동도, 연애도 거의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무가치한 과거였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그 시절을 아깝다 했지만 - 그러한 경험들의 부재는 분명 아쉽긴 하지만 - 나는 학점과 자격증, 어학 점수를 위해 후회 없는 미래를 향한 단단한 투자를 했으니, 나는 충분히 밀도 있는 삶을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외로웠던 순간에서 오히려 온전한 나를 들여 볼 수 있었고,
어지러운 머리와 흔들리는 마음, 앞이 아득해질 때마다 찾아 읽은 책들이 지금의 나를 채우고 있다.
방황하며 돌아다녔던 걸음들이 내 세상이 되었고, 말할 곳 없이 혼자서 끄적였던 글들이 지금 이곳에 재워져 있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것’
분명한 건, 전자로 보든 후자로 보든 간에 ‘아무것’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너머의 해석은 나의 몫이다.
지난겨울, 퇴근 후 하늘에서 내리던 보실보실한 흰 눈이 어찌나 어여쁘던지,
나는 우산을 접고 한참을 헤실거리며 집으로 걸었다.
집에 도착하니 온몸이 축축해졌지만, 얼른 씻고 이불속으로 들어갈 생각에 마음이 참 포근했다.
그 겨울 어느 날, 집으로 가던 길에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급한 대로 종이가방을 머리 위에 이고 정수리라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온몸이 젖어 괜히 처량해 보였다.
왜 그랬을까.
하늘에서 떨어진 물이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을 텐데. 그저 화학적 반응으로 인해 성상이 변한 것일 뿐인데.
나는 이토록 양가적이었나.
그 순간적이고 강렬한 생각 하나가 나를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나는 그 스침에도 큰 내상을 입었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없기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