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 - 수취인 없는 편지를 적어내며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누군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편지 쓰는 사람의 심정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의 글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그 중심이 있지 않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들 중에 '지식'의 종이라 분류하기에는 그들이 비교적 수면 부근에 서식하고, 하물며 상식이라 단정하기에는 그들의 생태가 너무나 좁기 때문이다.
여기 이곳에 내가 써내려 간 여러 장의 편지들이 있다. 발신은 오직 나로부터만 행해지는 일방성을 띤 글들. 다만 수취인에 대한 정보는 편지라 치부하던 그 어떤 글에도 하나 드러나 있지 않다.
나는 누구를 위해 편지를 썼던 것일까. 과연 누군가를 향해졌던 적이 있긴 했을까? 하염없이 적어내기만 한 편지글들은 수취인 확인 불가로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쌓여만 있었던 걸까. 아니면 향했다가 머무를 품 하나 찾지 못해 끝내 되돌아왔던 것일까. 그런 것도 아니라면 애초부터 이 편지의 운명이 다른 곳으로 부쳐 보낼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번 편지는 아마 수취인을 찾기 위한 구조(救助) 활동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언어와 소통, 그리고 편지
본질적으로 소통이라는 상호 간의 작용이 발효되기 위해서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있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잇는 언어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란 입말뿐은 아니다. 눈빛, 손짓, 이 모든 소심한 스침 또한 언어로 포함한다.
하지만 이 언어가 편지라는 낱장에 머물게 된다면, 소통 행위는 5할의 애틋함과 3할의 고독, 2할의 용기가 필요하다.
애틋함은 편지에 들이찬 대기와도 같다. 무엇을 혹은 누구만을 깊이 생각하며 출렁이는 감정과 일렁이는 마음을 종이에 한 자 한 자 눌러 쓰는 일종의 정신수양이자 의식이다. 청정한 애정은 나에게 너무 소중한 가치인데, 이것이 너무 가없이 아득하여 주체할 수 없이 쏟아낼 수밖에 없다는 이 필연 앞에서 나는 또 나의 이 마음을 아끼지도 못하고 이내 다 비춰내고 말았다.
이런 내가 너무나 속상하고 또 애가 타는데, 이 애정은 또 타자를 향한 세상 가장 순애하는 다정함이니 그저 애틋한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이고 쓰다가 지우다 혼자 이 마음을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 토렴한 후에야 비로소 한 문장이 진심을 다해 우려나올 테니 고독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용기란, 나의 진심이—어쩌면 나의 민낯이 당신에게 연약함을 드러냈던 오류 행위가 아니라—나의 천진함을 당신에게 보여줄 테니 나를 해치지 말아달라며 내가 들고 있던 나의 날카로움을 발밑에 내려두는 강인한 나라는 방증이므로, 용기가 그 마지막을 차지할 것이다.
표류와 귀환
너무나 오래 표류해 있었다. 흘러가다 보면 기필코 닿을 어딘가는 존재할 것이라 스스로를 타이르며 또 다독여야 살아갈 수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짙은 밤의 면포 아래에서 검정의 명도, 그 은밀함을 찾아내는 것만이 나의 밝음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책이었던 적이 있었다. 홀로 버티던 시간의 머물음. '외로움'과 '고독' 두 단어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은 채 며칠 밤을 울며 빌었다. 이 미묘함 사이에서 제발 홀로 있는 저는 부디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은 이유 때문은 아니라는 말을 해달라고.
그렇게 단련해야만 했던 그 시절 속에 멈춰버린 아주 어린 내가 그 자리 그대로 움크린 채, 어른이 되어버린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나에게 닿기 위해 글을 쓴다.
진심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이곳에 여러 편의 글을 써내려 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만큼은 진실이다. 잘난 내용, 멋드러진 표현 하나 없지만 나의 가장 진심이 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내가 말하는 진심이란 특별할 게 없다. 그저 나를 드러내는 것. 나는 누구에게 의탁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종교이자 신은 나로부터 나온다는 믿음, 그 신실함을 지켜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물론 그 '씀'의 순간을 위해 떠올리는 사람과 문득 떠오르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전하는 글은 아니다. 그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나의 마음의 온도, 연성, 모나고 각짐, 경도 이 모든 결함들마저 나의 모남이 아니라 어쩌면 미숙함이라 위로하기 위해 풀어내기 위함이다.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가장 내밀한 나의 진심이 드러나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수취인이 불분명한 이 편지들이 언젠가는 그 품을 찾아 닿기를, 온기를 느끼기를 바란다.
그리고 만약 그 품이 나일 수 있다면, 기꺼이 나 자신을 안아주려 팔을 뻗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