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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곡선에서 시작된 행복론

행복의 기원 : 목적(.) 혹은 수단(?)

by 필연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부제가 이끌려, 나는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지, 실재하는 것인지 묻는 회의주의의 내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은 분명 존재한다는 단호한 어조가 반가웠다. 기쁘기도 했고, 행복의 근원을 -특정 지점이든 어떠한 방법이든- 알아낼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든 이 무형함을 붙잡을 수 있으리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은 단순히 ‘행복의 기원’에 대한 서평을 쓰려는 시도가 아님을 먼저 밝혀두려 한다.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의 최고 목적은 행복’이라는 인생관을 뒤집어엎으며 시작한다.

지나치게 목적론적인 행복관에 회의를 표하고, 다윈의 진화론을 끌고 들어와 행복 위에 생존을 두어 대립시킨다. 모든 생각과 행위는 결국에는 생존을 위한 도구이며, 행복감 역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을지 고민해 보도록 만든다. 행복이 목적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생존을 위한 도구에 불과할지 - 이 물음에서 우리의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 행복이 목적이냐 수단이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논제의 답을 찾는다고 하여 행복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는 다소 이상한 전개 아닌가. 오히려 머리를 부여잡고 고뇌하다 행복이란 없다고 체념하는 허무주의자가 되는 서사가 실현적이어 보인다.


행복을 목적이라 여기는 사람은 어쩌면 낭만적인 종교인에 가깝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치를 삶의 종착지라 믿으며 끝없이 걸어가야 하니 언젠가는 지치지 않을까 염려된다. 달에 토끼가 산다고 믿거나, 평생 단 하나의 콩나무에 오르려는 잭은 그 끝에 행복을 만났을까.


그에 비하면 행복을 수단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감성적인 과학자 같다. 인간에게 필수 조건이 의식주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충족하며 모든 삶의 순간들을 꾸려나가고, 이 모든 여정은 생존이 바탕이다. 아무렴 삶도 직선이라고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생'과 '사' 사이의 선분이라 일컫는 게 맞다. 태어남으로 시작된 생을 무사히 끝내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본질적 임무이자 유일한 목적이라면, 행복은 그저 살아가기 위한 대기 속 산소 같은 존재 아닐까.


우리는 숨을 쉬지만, 그 행위를 의식하지는 않는다. 만약 매 순간의 숨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비극적인 형벌일 것이다. 살아있는 자만이 숨을 쉬고, 죽은 이는 숨을 멈춘다. 그러니 살아있는 자들이 저들의 숨을 의식하는 행위는 불필요한 낭비일 뿐이다. '당연한 것'은 불변의 진리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본인들의 소유물쯤으로 여기고, 정작 안녕을 위하여 안위를 돌보지는 않는다.


허나, 세상을 넓게 보면 당연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내가 암병동에서 근무했던 잠깐의 시간 동안, 생과 사의 경계가 색종이 한 장보다 얇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람은 오직 그 하나의 호흡만으로 생사를 가른다. 세상은 숨 하나의 부재에도 금세 밤으로 기운다. 그 순간, 나는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그것은 단지 숨 하나에도 머금어져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을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바라왔던 것이었을까. 어지러웠다.


행복을 목적이라 삼은 삶은 아득해서 참 애처롭고, 흔들린다. 하지만 수단으로서의 행복은 물질적이다. 쓸모가 있다. 행복이 목적이라면 그것이 단일할수록 그 몫이 커지겠지만, 수단으로서 행복은 그것이 무궁해질수록 지평이 넓어진다. 도구의 쓰임은 그것을 쓰는 이의 손끝에 달려 있듯, 행복 역시 쓰이는 순간마다 , 아니 그 쓰임을 발견하는 순간마다 경이롭고 즐거워질 수 있다.


(여기서 잠시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사람은 행복을 위해 삶을 살 수도 있고, 행복으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어떤 쪽을 선택하든 그것이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면 충분하다. 타인의 판단이 아닌 본인의 삶에서 기원한 결정이라면, 설령 단 한 사람만 믿는다 하여도 - 그 사람이 자신이라면 - 그것만으로도 철학이 되고 신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제 나는 행복의 정의를 위해 고뇌하지 않으려 한다. ‘무엇’이 아니라, ‘무언가’라는 표현이 적절한 행복에, 정확한 방법이 현재로선 떠오르지 않는다.


언어 놀음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전자는 실재를 지시하기에 어쩔 수 없이 참과 거짓을 낳아야 한다. 하지만 후자는 삶의 은유로 은근하게 드러난다. 창문을 단순히 건물 벽에 만들어진 개구부라 정의하는 이는 명석하게 살겠지만, 창문을 세상을 담아내는 틀이라 바라보는 이는 분명 명랑하게 살아낼 것이다. 전자는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창이라면 만족하겠지만, 그 ‘당연함’ 속에서 늘 행복할 수 있을까. 나에게 행복한 삶이란 이러한 뉘앙스다.


결국에는 행복을 앞에 두고 '실리'를 따지게 되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행복을 '명확히' 포착하려 한다면 차라리 사진을 찍는 편이 낫다. 그러나 나도 너도 비슷한 작품들을 앞에 두고 어떤 것이 더 뛰어나고 우수할지를 고민하는 일보다, 차라리 장르를 바꿔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창적인 행복을 창조해 내기 위해 애쓰겠다.


삶의 대지 위에 주체적으로 서서, 대기 속에 맨 얼굴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며, 그 순간의 감각을 늘려가는 것 - 그것이 바로 나의 ‘행복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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