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부정적 감정은 그대로 마주할 때 녹아내린다

by 마이크mike

“마이크 님이 요새 많이 느끼는 감정이 뭐예요?”


연기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대사를 다 읽고 나니, 갑자기 물어보셨다. 요새 느끼는 감정…. 있긴 했다. 근데 이런 진지한 답변을 해야 되나, 주저했지만 역시 대답할 게 그것밖에 없었다.


“요새,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이 감정을 예시로 들자면, 어린아이였을 때 느끼는 것과 닮았다. 실제 기억처럼 머릿속에 있는 장면이다.

네다섯 살의 내가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보통이라면 할머니가 집에 계셔야 했는데, 인기척 없이 가라앉은 공기가 느껴졌다.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봐도 아무도 없었다. 밖은 환했지만 빈 공간이 무서웠다. 지구상에서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았다.


외로움에 대해 곱씹을 때 종종, 진짜인지 모를 이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릴 때와 차이점은 혼자 있지 않아도 외롭다는 것이다. 누구와 같이 있어도, 속에서 얼핏얼핏 외로움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그럼 그 감정을 느낄 때 마이크 님이 하고 싶은 말을 써 볼게요. 그리고 그걸 읽어 볼 거예요. 아무 말이든, 짧든 상관없어요.”


편하게 쓸 수 있도록 선생님이 잠시 연습실 밖으로 나가 주셨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려고, ‘외로울 때’라고 종이에 끄적여 봤다. 그 옆에 사람 형체의 그림도 단순하게 선으로 그려 봤다.


외로울 때…, 그럼에도 누가 옆에 있길 바란다. 기대고 싶은 쓸쓸함을 담아, 하고 싶은 말을 한 줄씩 써 내려갔다.

아까는 머릿속이 하얬는데 외로움에 잠긴 모습을 떠올리니 한마디씩 할 말이 생겨났다. 단문이지만 다섯 줄이나 썼다. 그런데 간단해도 진심이어서 그런지, 가슴이 먹먹하고, 곧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최대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다. 핸드폰 액정을 거울 삼아 얼굴 상태를 보고 있을 때,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자리에 앉으신 후, 쓴 것을 슥 보셨다.


“자, 이제 한번 읽어 볼게요.”


겨우 추슬렀던 감정이 첫째 줄을 읽기 전부터 광광, 치고 올라왔다. ‘참아야 돼.’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지만, 이제 콧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으로 닦으면 또 줄줄 흘러서, 선생님 쪽에 있는 휴지를 달라고 했다. 휴지로 코를 거의 틀어막으며, 다시 한번 첫째 줄을 보았다.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성대가 가슴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먹혀 들어가고 무거웠다. 음은 낮았다.


셋째 줄을 읽다가,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계속 읽기엔 제대로 발음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러서, 멈추고 울어 버렸다. 쪽팔려서 차마 엉엉 소리를 내진 못했다.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으려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휴지에 얼굴을 파묻고, 얼굴에서 나오는 물들을 닦아 내는 데 정신없었다. 선생님이 이 연습의 의도를 차분히 설명해 주셨는데, 울음을 그치느라 거의 한 귀로 흘려보냈다.


한바탕 울고 나니, 내가 가진 외로움이 얼마나 켜켜이 쌓여 왔는지 알게 됐다. 고작 몇 마디에 이렇게 요동칠 줄이야. 그동안 외로움을 꾹꾹 누르기만 해서 압력에 못 버텼는지 터져 버렸다.


이렇게라도 터지니 꽉 찼던 공간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후끈후끈하지만 시원한 열기가 가슴께에서 퍼졌다. 생리적으로 이걸 사늘하게 식혀 줄 것을 찾았다.


아이스크림.



연기 수업이 끝난 후, 본능에 충실하여 곧장 배스킨라빈스로 향했다. 가게에 도착해 키오스크에서 메뉴를 살펴보았다. 가장 좋아하는 맛인 ‘사랑에 빠진 딸기’가 없었다. 최애가 없는 게 아쉬웠지만, 남아 있는 맛들 중 하나를 골랐다. (알고 보니 그 맛은 작년에 단종됐다고 한다.)


번화가가 아닌 동네 배스킨라빈스라 매장에 손님이 없었다. 아무 자리에 앉았다.

아깐 그렇게 펑펑 울어 놓고, 바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온 게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주문한 아이스크림은 금방 나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이름의 맛이다.


‘기껏 먹으러 왔는데 제발 맛있는 맛이어라!’ 하는 마음으로 한 입 떠먹었다. 블루베리와 치즈케이크의 조합이 꽤 괜찮았다. 부드러운 치즈 크림의 맛이 많이 달지도 않고, 기분 좋게 만들었다.


텅 빈 매장에 초점 없이 멍때리며 먹었다. 한 명, 두 명 손님들이 들어왔다. 세월의 깊이가 있어 보이는 중년 신사분이 키오스크에 오래 서 계신 걸 보며, ‘뭐가 잘 안 되시나 보다.’ 생각하고 오지랖 좀 부리다 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다 사라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녹은 것들을 긁어 먹었다. 뜨끈뜨끈했던 속은 적당히 차가워졌다.



감정은 날씨와 같다고 들었다. 시시때때로 왔다 가지만, 긴 장마처럼 고여 있는 것 같을 때, 맨몸으로 비를 다 맞는 것도 방법일 듯싶다. 얼마나 빗방울이 떨어지는지, 그 감촉은 어떤지, 그런 것들을 느껴 보는 거다.

그것들을 정면 돌파하면, 조금씩 잦아드는 것 같다. 견뎌 낸 자신에게 아이스크림 같은 작은 보상이라도 주자. 조그맣지만, 의외로 그게 달래 준다.


앞으로도 외로움이 자주 찾아올 걸 안다. 그래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날이 뒤이어 올 것이다.





9편 외로울 때_크기조정.jpg 연기 수업 중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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