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흔들릴 때, 나는 매뉴얼을 꺼냈다
폭력이 있었던 건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몸싸움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중 일부는 그저 옆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O학생과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지켜보기만 한 것도 방관입니다. 모두가 사과해야 합니다.”
결국, 사안은 교육청 심의위원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심의위원회는 어른들이 보기엔 행정 절차지만,
학생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고, 그 자체가 큰 긴장이다. 성인들이 경찰서와 법정에 가기 전에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내려질 조치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된다.
나는 O학생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두 학생은 심의에 가지 않게 해 주실 수 없을까요?"
하지만 그분은 단호했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말리지 않았을까요?"
결국, O학생과 다섯 명의 학생 모두가 출석했다.
피해학생인 O는 심리상담 조치를,
가해학생 H는 폭력행위에 따른 조치를,
나머지 네 명은 ‘학교폭력 사실 없음’이라는 결정을 받았다.
결과만 보면 잘 됐다고 할 수 있지만, 심의위원회에 참석하고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3주 동안
관련 학생들과 보호자에게는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을 거다.
나 역시 이때가 여름 방학이었지만 쉬지 못했다. 결과가 잘못 나온다면 내 책임이다라고 생각하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사안이 모두 정리된 후, 나는 결과를 알리기 위해
관련된 모든 학부모님께 전화를 돌렸다.
하기 싫었지만, 그게 도리라고 생각하여 늘 내가 하던 절차였다.
전화를 돌릴수록 느껴졌다.
다들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었고, 이미 학부모들끼리도 통화를 하며
많이 울기도 했다고 전해 들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전화를 미뤄두었던 O학생의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 학교 폭력 업무 담당 000입니다."
"네 선생님 결과 보셨어요? 저는 이해가 안 가네요."
대뜸 결과가 이해 안 간다고 하는 모습에 너무나 예상했던 모습이라서 한편으로는 실소가 나왔다.
"네 아버님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거 다시 접수하고 싶은데요..? 이해도 안 가고 다른 4명은 방관했는데 왜..."
"네 아버님 접수는 해당사안에 대해서 다시 접수하실 수는 없습니다... 매뉴얼이 그렇습니다."
"하.. 어이가 없네요 무튼 알겠습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솔직한 마음으론 ‘마지막까지 이러시나’ 싶었지만,
그래도 ‘끝났으니까 그만 생각하자’는 마음이 더 컸다.
다른 학부모님들의 심정을 알기에 후련하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 태도에 대한 후회가 가장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목 대상은 바뀌고 요구도 점점 무리해졌고,
관련된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지쳐갔다.
‘처음에 선을 확실히 그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사안을 접수하면 처음에 지목 대상과 처리 기간을 명확하게 정했다.
사과방식이나 자신의 말을 전해 달라는 요구에는 전담기구위원과 상의하였고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다느 생각이 들면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씀드렸다.
상대에게 친절하게 보이진 않을 수 있지만, 이건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선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예전처럼 따뜻한 교사는 아닐 수 있지만,
상황을 안정적으로 중재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이후에 상처받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게 나에게는 정말 큰 변화였다.
이 사안을 겪고 나서, 나는 정말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일하는 방식을 많이 바꾸었다.
일단 매뉴얼을 지켜가면서 일을 했다. 가끔 스스로에게 너무 중립을 지키는 건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도 있었지만 일단 나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폭력 업무를 맡으면서 교감 선생님께서, 또 나의 업무 멘토로부터 '이 업무를 할 때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 '나 자신부터 지켜라'라는 말을 들었던 게 이제 이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