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는 빵도 굽고, 콩깍지도 굽고, 햄도 구웠다. 세탁기와 건조기도 돌렸다. 갑자기 정전이 되어 어제 사놓은 고기를 버리게 되었고, 핸드폰 충전 대책을 급하게 마련해야 했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하철 안내원과는 두 번째 만남이다. 영수증이 출력되는 동안 티켓을 흔들며 농담을 건네주셨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면 내가 좀 더 준비를 해야겠다는 각성이 생겨 어젯밤에는 내가 방문할 곳의 동네 지도를 미리 익혀놓았다. 지하철 출구에 나와서는 걸음을 떼기 전에 조금 더 차분히 지도를 확인하기로 한다. 몬트리올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에 전날 밤 지도에서 봤던 상호들이 나타났다. 메뉴도 다양하고 가격도 좋은 식당들이 많아 왔던 길로 되돌아오면서 그중 한 곳을 들르면 되겠다 싶었다.
몬트리올 미술관까지 10분 정도 걸었다. 가는 길에 아이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
"엄마, 캐나다가 잘 살아, 우리가 잘 살아?"
순간 캐나다의 1인당 GDP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없어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우리보다는 높겠지만 생각보다 차이가 많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우리가 캐나다 1인당 GDP이 3/4 정도 되었다.
몬트리올 미술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작품이 많다는 리뷰를 많이 접했는데, 과연 그랬다. 미술사 서적에 등장하는 웬만한 대가들의 작품이 한두 점 갖추어져 있었고, 유럽 여느 도시에서 꼭 보게 되어 있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캐나다가 우리보다 확실히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은 종종 국내에도 전시가 되었지만, 달리의 작품 실물은 이십몇 년 만에 처음 봤다. 그땐 달리를 정말 좋아했었는데... 피카소와 마티스의 작품도 그동안 국내에서 볼 기회가 종종 있었지만 여기 전시되어 있는 마티스의 작품이 좋아서 행복했다. 바스키아와 요셉 보이스, 아르프, 자코메티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관 건물도 인상적이었다. 색이 고른 대리석 타일이 바닥에 넉넉히 쓰였고, 무늬가 다양한 목재로 내벽을 채웠다. 먹거리는 부족하지만 건축 자재만큼은 풍족한 나라인가 보다. 계단과 통로는 전시 관람 동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위치되어 있었고 유리창 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실내가 조금 건조했는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재인이가 음료수를 찾았다. 아무래도 미술관은 아이에게 힘든 코스이긴 하지. 한 층만 보고 우선 카페로 가서 콜라 한 캔을 사서 앉았다. 그리고 충분히 쉬기로 한다. 어제도 딱 이 시간에 재인이가 피로를 호소했었다. 시차 탓이다. 그래도 어제보다 안색이 많이 좋아 보였고, 집에 들러 쉬었다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재인이도 정전이 되어버린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미술관을 나와 잠시 산책을 즐겼다. 미술관 앞에 펼쳐진 비탈진 큰길은 몬트리올에 와서 걸었던 길 중에 가장 예쁘고 분위기도 편안했다. 반대편 언덕 위 아름다운 집들과 그 사이사이에 놓인 아름다운 단풍나무들을 즐기기도 좋았다. 재인이도 이 길을 마음에 들어 했다.
버스를 탔다. 차츰차츰 언덕 위로 오르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였다. 지하철처럼, 두 량이 붙어있는 버스였는데, 생각보다 빨리 달려서 좀 놀랐다. 목적지에서 도착하니, 높은 지대라 그런지 바람이 무척 쌀쌀하게 느껴졌다. 어제보다 도톰한 기모 티셔츠에 경량패딩을 두 겹 껴입고 머플러를 두르니 딱 좋았다.
재인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성요셉 성당을 정말 좋아했다. 이곳에 오르면 몬트리올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더니, 몬트리올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까지 보이는 듯했다. 붉은 물과 노란 물, 여전히 초록인 가을 나무들이 건물들과 섞여서 그 넓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 너머 강과, 그 강 너머 산맥들이 붓으로 그린 선처럼 끊김 없이 펼쳐져 있었다. 재인이는 그 풍경을 열심히도 찍었다. 핸드폰 배터리를 아껴야 하는 상황이라 나는 지도를 보는데 집중하고 사진은 재인이가 찍기로 했다.
아침에 숙소를 나와 오후 네 시까지 외출한 셈이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계단이 유독 많아 긴장이 되기도 했다. 정전이 된 집에서 뭔가를 해먹을 수도 없고, 사놓은 고기도 버린 셈이니 저녁거리를 사가지고 가기로 한다. 아까 왔던 Guy-Concordia 역으로 되돌아와 케밥집으로 들어갔다. 케밥 주문은 처음이라 메뉴판을 한참 읽었는데, 재인이가 피곤했는지 좀 보챈다. 간판은 영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불어를 조금 익혀 온 덕분에 메뉴를 대충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안전한 메뉴를 시켰다. 밥과 치킨, 감자튀김 포장 1인분이 1달러가 약간 되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싫어할 수 없는 구성이다. 숙소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재인이를 달래며 마트도 들르기로 한다. 케밥만으로는 끼니로 부족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Fruit'와 'Legume(야채)'이 적혀있는 마트가 눈에 확 들어왔다.
숙소에 돌아오니 전기는 복구되어 있었고, 조금 덜 마른 채로 건조기에서 꺼내어 널어놓았던 빨래들도 말라 있었다. 심지어 고기와 햄도 건재했다. 재인이는 서둘러 발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갔다. 세 시간 낮잠을 자고 밤에 일어나 어제처럼 늦은 저녁을 먹었다. 지금은 수학 문제를 풀고 있고 나는 옆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다시 잠을 청하기에 수학 문제도 글쓰기도 좋은 작업인 듯하다.
2025.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