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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불행과 낯선 행복 사이에서

우리는 왜 떠나지 못하고 익숙한 불행을 반복할까?

by 북수돌 Feb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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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25. 2. 19~2. 20)


"난 너무 늙었어."

폴이 시몽에게 이별을 고하며 뱉은 마지막 말이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나이 듦이 아니라, '나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힘이 없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불확실성과 싸우는 과정이다. 기존의 생활방식을 깨야 하고, 익숙한 것들을 버려야 하며, 스스로 변해야 한다. 하지만 폴은 변화를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 잘 아는 불행 속으로 돌아간다.


폴이 시몽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시몽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보지만, 그 길을 불안정하다고 느낀듯 하다. 시몽은 한참 어린 남자이고, 세상의 시선도 곱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로제와는 다르게 시몽은 전적으로 폴에게 몰입한다. 시몽의 사랑이 뜨겁고 헌신적일수록, 폴은 그 감정을 짊어질 자신이 없어 보인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버거운 순간이 있다. 시몽과의 관계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여러 현실적인 요소들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였다.


반면 로제와의 관계는 불행할지라도 익숙하다. 폴은 6년 동안 로제에게 외면받으며 외로움을 견뎠지만, 그 외로움조차 이제는 편안하다. 마치 낡은 소파처럼, 불편한 줄 알면서도 몸을 깊이 묻으면 어느새 익숙해지는 것처럼. 새로운 행복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을 감수해야 하지만, 폴은 이제 더 이상 그럴 용기가 없다.


그녀의 선택이 끝나자마자, 익숙한 불행이 다시 시작된다. 마지막 장면, 로제와의 통화에서 로제는 바쁘다고 말한다. 폴이 기대했던 재회 같은 건 없었고, 로제는 언제나처럼 자기 일정에 바빴을 뿐이다. 폴이 불행을 감내하며 붙잡았던 관계는, 그녀에게 단 한순간의 안정도 주지 않는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건 사랑이 아니라, 변화를 두려워한 채 반복되는 불행이었다.


우리는 종종 폴과 같은 선택을 한다. 우리는 왜 떠나지 못하고 익숙한 불행을 반복할까? 불행하다는 걸 알면서도, 최소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익숙한 삶을 붙든다. 낯선 행복은 두렵고, 실패할 가능성이 있으며, 감당해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그 선택을 피한다고 해서, 안정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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