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슈퍼맨: 우리 아빠
"왜 딸들이 '나는 커서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라고 하잖아요? OO를 만나면서 그 꿈을 어느 정도는 이룬 것 같아요."
결혼식 때 짧은 영상 인터뷰를 틀었었는데, 한 질문에 내가 답한 내용 중 일부다.
진심이었다.
우리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결혼 전 나를 언제나 따라다녔다.
아빠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능력있고, 성실하고, 똑똑하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다. 늘 인정받았고, 존경받았고, 무엇보다 가정에 충실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20년이 넘도록 천안과 서울을 오가며 일하면서도, 오피스텔 하나 얻지 않고 매일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긴 출퇴근 끝에 지쳐 있었을 텐데, 아빠는 늘 천안에서 호두과자를 사 왔고, 우리 형제는 그걸 오손도손 나눠먹으면서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주 어릴 적 아빠 병원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간호사 언니들이 "너희 아빠 무섭지 않니?"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빠가요? 왜요?"
그땐 몰랐지. 우리 아빠가 사회에선 꽤 무서운 사람이었다는 걸.
아빠가 집에 올 때마다, 나는 뛰어나가 안겼고, 엄마는 나를 뒤따라와 아빠를 반겼다. 아빠는 그런 나를 늘 번쩍 들어 안아줬고, 그 품 안에서 나는 세상 누구보다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엄마에겐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 모른다. 엄마가 뭐 먹고 싶다, 사고 싶다, 어디 가고 싶다고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빤 1도 놓친 적이 없다.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엔 엄마의 의견이 항상 우선이었고, 그런 엄마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가장 멋진 순간은, 친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우리는 큰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형제들 몰래 재산을 모두 본인 명의로 돌려놓았고, 아빠는 자신의 부모를 돈으로만 바라본 형의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할머니는 아빠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아빠가 한국으로 오는 사이 장례식은 시작됐고, 큰집은 아빠 없는 틈을 타 마치 주도권이라도 잡은 마냥 장례식장에서 위풍당당하게 행동했다. 이들은 눈물 한 방울도 내비치지 않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큰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앞에서는 타지도 않았던 외제차를 끌고 온 큰아버지가 너무 미웠다.
아빠가 들어오는 순간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오른손에 성경책을 들고 눈시울이 벌게진 채로 뚜벅뚜벅 걸어오던 아빠.
나는 조용히 “아빠…”하고 불렀고, 아빠는 붉어진 눈과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할머니 영정사진을 몇 초 바라본 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기도하셨다.
그리고 상조회사 직원에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세례 받은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기독교 장례로 치러주세요.”
그 한 마디로, 장례식장 분위기가 따뜻하게 바뀌었다.
분위기가 변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를 이때 엄청 크게 느꼈다.
큰아버지의 작은 딸도 가족을 데리고 우리와 함께 기도했을 정도였으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장례식장을 비웠지만, 아빠는 3일 내내 영정사진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는 거기에 앉아 성경책을 계속 읽었다. 두 눈은 3일 내내 붉었고, 눈물로 눈이 촉촉했다.
"아빠 뭐 해? 괜찮아?"
"응, 성경책 읽고 있었어."
아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성경구절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날 나는 아빠가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단단했고, 누구보다 따뜻했으며 인간적이었다.
여기에 비유할 바는 아닌데 '겉바속촉'을 사람으로 나타낸다면 꼭 아빠가 아닐까.
겉으론 너무나도 단단한데 속은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
요즘 나는 아빠에게 전화할 때 꼭 “아빠 사랑해!”라고 말한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아빠도 이젠 내가 말하지 않으면 서운해하신다.
아빠가 내 아빠라서, 참 감사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빠가 내 곁에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있어주길 바란다.
아빠가 없는 삶은 생각하기도 싫다.
독자님들도 그런 ‘슈퍼맨’이 있다면
“사랑해요” 한 마디 전해 보는 건 어떨지.
그 한 마디가, 그 사람의 하루를 그리고 당신의 하루를
아주 따뜻하게 바꿔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