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기행] 환영받지 못한 최고의 랜드마크

<문화과학궁전>, 사회주의 시절의 대표적인 잔재

by 흑투리


환영한다, 본인의 글을 찾아온 호기심 많은 독자들충성스러운 구독자들! 이번 글은 여러분의 보다 생생한 공감을 위해서, 본격적인 설명을 하기 전에 극단적인 가정을 하나 하려고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니까, 부디 노발대발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드디어 기나긴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서 벗어나 감격스러운 광복절을 맞게 된다.

일본 세력들이 모두 물러나고 한국은 미 군정, 소련 군정 하에 분할 점령 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중국 공산당의 지배 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생각보다 빨리 세워진다.

소련보다도 강해진 중국 공산당은 그 옛날 일제와 함께 싸운 대한민국과의 우애를 떠올리며 한반도에 건물을 하나 세워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중국 공산당은 한반도에 굉장히 큰 중국식 궁전을 하나 지어 주는데, 그 궁궐은 향후 세계로부터 '제2의 자금성'이라고 불리게 된다.



Q. 위의 상황이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당신의 기분은? (단, 이 문제를 푸는 사람은 반드시 한국인일 것.)





자, 무슨 생각이 드는가. 투리가 예상하기에 아마 한국인이라면 최소 75%는 욕부터 박고 대답을 할 것이다. 뭐, 그에 대한 이유는....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그 정도의 기본 소양은 투리가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겠다(제발). 방금 여러분이 느꼈던 그 기분이 바로 여기, 오늘 설명할 건물에 대해 폴란드 사람들이 가졌던 그 기분이다! 그렇다, 아까 그대들이 본 이 글의 배경 속 건물. 그 건물 얘기하는 거다. 그러면 대체 저 건물은 어떤 건물이고,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저 바르샤바에 세워진 것도 모자라 아예 랜드마크가 되어 버린 걸까? 이번 글에서는 그에 대한 얘기를 해 보자. (이제 여러분은 이번 글을 끝까지 읽어줘야 폴란드인과의 의리를 지킨 거다)



바깥에서 본 건물의 사진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돌아온 뒤 이어진 평범한 나날. 수업이 끝나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이번 주에는 어딜 갈까 고민해 봤다. 여러 군데가 후보지로 떠올랐는데, 이전에 ESN이 처음에 바르샤바 투어를 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 가이드가 시즈몬이라는 덩치 큰 현지인 친구였는데, 문화과학궁전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장소들을 소개했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몇 시간 안에 투어를 마쳤어야 해서, 슬프게도 모든 곳들을 꼼꼼히 보지는 못했었다.



투어를 마치고 들었던 생각은 나중에 한 군데 한 군데를 집중적으로 돌아보고 싶다는 거였는데, 문화과학궁전부터 시작하면 뭔가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투리는 수업이 끝나고 도시 중앙으로 가서 점심을 해결한 다음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마침 1권에서 바르샤바의 첫인상을 얘기했을 때 문화과학궁전에 대해서 나중에 따로 써 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그 약속을 여기서 지키도록 하겠다.

(1권 9화 '이딴 데가...수도?' 참조)



근처 피자 헛에서 피자 하나랑 콜라 한 병을 주문함.



여담으로 피자 헛에 대한 얘기를 살짝 하자면, 이쪽 근처 피자 헛은 기계가 자동으로 손님한테 음식을 가져다준다. 한국에도 저런 기계가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투리 인생에서 저걸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릴 줄이야, 신기했다.

(나중에 쉬고 있는 기계의 표정을 보았는데 참으로 귀요미ㅜ)





본론으로 돌아와서, 위 사진이 뭔가 고풍스러우면서도 고압적이었던 아까 그 건물의 1층 모습이다. 이 날은 왼쪽 공간에서 특별히 옷 전시회를 진행하는 것 같았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뭔가 분위기가 있고 다가가기 어려운 그런 느낌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외부에 비해 훨씬 캐주얼하고 활기찼다.



투리가 1권 9화에서 지나가듯이 말했지만, 바르샤바에 사는 현지인들은 역사적으로 이 건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건물을 지은 주체는 소련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에게 소련이 어떤 존재인지는 이전의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한국에 치환하면 중국 같은 국가이다. 투리가 초반에 그런 질문을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중국인이나 구소련 사람들을 비하하는 발언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관계가 그렇다는 얘기다. 아무리 중국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팩트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왼쪽은 들어가려면 따로 계산을 해야 해서 들어가지는 않았고, 오른쪽 뒷부분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해당 통로는 지하철역이랑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꽤 넓은 공간을 제외하면 딱히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기념품점이랑 작은 상점이 전부였던 걸로 기억한다.



작은 기념품점에서 발견한 자석들



아래층에 찍을 만한 사진은 이게 전부다. 이쪽 공간은 슬슬 할 말이 떨어졌으니, 깨알 배경설명으로 오디오의 빈 공간을 채워드리겠다. 여기 문화과학궁전은 높이 237M로 폴란드에서는 두 번째로, 유럽 연합에서는 여덟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그 유명한 이오시프 스탈린이 1955년 증여 형식으로 완공시켜 준 스탈린식 양식의 건물이며, 이에 따라 정식 명칭에 스탈린의 이름이 있었으나 나중에 삭제되어 지금과 같은 정식 이름(Pałac Kultury i Nauki imienia)을 가지게 되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건물은 총 42층에 첨탑의 높이가 49 미터이고, 객실 수는 모두 합쳐서 3,288개라고 한다. 물론 이 안에는 사무실 등도 있어서 일반인이 저 모든 객실을 다 들어갈 수는 없고, 허용된 곳은 일반적으로 아래층과 맨 위층을 비롯한 일부 공간에 한정된다. 건물의 내부에는 주로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화관, 극장, 박물관, 서점, 회의장, 전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이외에 FM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 송수신 장 역할을 담당하는 공간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논쟁이 여러모로 있긴 하지만, 이 건물은 당시의 강력했던 공산주의와 소련의 영향력을 상징했던 바르샤바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다. 아이러니한 것이, 문화과학궁전은 분명히 폴란드인에게는 기분 나쁜 곳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바르샤바에 수많은 관광객들을 데려오는 효자 건물이기도 하다. 심지어 관광지를 넘어 아예 바르샤바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들리는 바에 따르면 폴란드에서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관광 책자에서는 저 건물이 상징적인 표지로 나온 적이 없다고 한다. 오죽하면 "바르샤바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문화과학궁전에 사는 사람이다. 그 건물을 안 봐도 되니까."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움직이면서 얘기하자. 장소를 바꿔, 꼭대기 층으로 갈 수 있는 곳으로 가보자. 그런데 위에 올라가려면 티켓이 필요하다네?





티켓이 필요하다면, 사면 그만이다! 안내 데스크에서 티켓을 구입한 투리는, 곧장 위 사진의 바코드에 종이 티켓을 찍고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엘리베이터에서의 신호음이 꼭대기 층의 도착을 알렸다. 위 사진은 꼭대기에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모습을 찍은 것이다. 높이가 꽤 넓어 보이지 않나?



지금까지 이 건물의 역사나 전체적인 조감을 살펴보았는데, 한국에 있'었'던 어떤 추억(?)의 건물이 연상되는 분이 계실 수도 있다.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조선 총독부' 건물 말이다. 두 건물 모두 외세 권력의 과시물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기능적 차이가 있다. 일단 조선 총독부는 한반도의 통치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역대 일본 총독들미군정 사령관이 직접 통치하던 행정 건물이다. 하지만 문화과학궁전은 처음부터 문화 행사나 학술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던 소프트 파워적 건물이다. 정치적이나 상징적인 면에서 와닿는 굴욕감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조선 총독부는 한민족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경복궁과 광화문의 풍경을 가리고 있어서 민족의 상징을 훼손시킨다는 비판이 상당했다. 반면 문화과학궁전은 그에 비하면 철거할 정당성이 그리 큰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행사 때 화려한 조명과 불꽃놀이로 관광객의 이목을 끌면 끌었지, 솔직히 말하면 폴란드인한테 직접적인 해를 끼친 적은 없다. 다만 그걸 만든 주체가 스탈린이라서 "레이스 입은 코끼리"라니, "스탈린 대성당"이라니 하면서 까이는 것일 뿐.





자, 지금까지 투리의 지루한 설명을 들으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바깥 풍경도 못 보고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아래부터는 문화과학궁전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위 사진들은 문화과학궁전의 각각 다른 방향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어떤가, 지금까지 봤던 폴란드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나지 않은가? 이런 광경은 브로츠와프나 크라쿠프, 혹은 바르샤바의 구시가지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일 것이다. 유럽 전체를 통틀어도 드문 여러 개의 고층 건물과 그러면서도 아래에 유럽 색채를 조금씩 풍기는 건물들의 조합. 그 독특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또 다른 방향에서 찍은 바르샤바의 풍경



참고로 이곳 부근에는 문화과학궁전을 포함하여 고층 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총 8군데 존재한다. 그중 문화과학궁전은 두 번째로 가장 높은 건물에 속한다. 당시 가이드 시즈몬에 의하면 가장 높은 건물은 높이 310M의 Varso Tower인데, 비교적 최근인 2022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시즈몬이 손가락으로 Varso 건물을 가리켜서 그 건물을 보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사진은 찍지 않았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찾아보시면 될 것 같다. 아무튼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고층 건물들이 한 곳에 여러 개가 모여 있는 도시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도 흔치 않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만 따진다면 더더욱.





여기도 사람이 지나가는 곳이라, 풍경과 안쪽 공간 사이 통로에는 이런저런 스티커와 사람이 누울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정교하면서도 딱딱한 건물의 이미지에 저런 인간적인 요소들이 들어간 걸 보니, 좀 더 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보면, 굳이 관광객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문화과학궁전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인정받고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안쪽에 있는 카페와 벽에 걸린 사진들까지 천천히 구경하는 것으로, 투리는 문화과학궁전의 관광을 마쳤다. 전체적으로 관광객한테 열려 있는 대부분의 장소들을 보여줬는데, 독자 여러분은 어땠는가? 폴란드인의 입장에서 분명 기분 나쁜 곳이라는 건 맞지만, 정서에 비하면 잘 꾸며져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해당 궁전의 불쾌한 양식과 배경은 분명히 폴란드인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 건물은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바르샤바의 중심에 우뚝 세워져서 70년을 지탱해 왔다. 그동안 여러 실무적인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문화과학궁전은 꿋꿋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왔던 것이다. 말 그대로 환영받지 못하는 최고(最高)이자 최고(最古)의 건물이 된 셈이다.



미우나 고우나 다른 고층 건물들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건물이 바르샤바의 이미지를 만들어 준 존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투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는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의 세대가 훗날 이 건물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게 단순히 철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바뀌는 것처럼, 건물도 바뀐다. 대다수 여론의 입장은 아니겠지만, 누군가는 저 궁전을 바라보면서 폴란드의 새마을운동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런 그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궁전 주변이 달라지는 모습을 계속 보았더라면, 그 궁전은 바르샤바 재건의 상징으로도 여겨졌을 여지가 있다.



엘리베이터 안을 내려가면서 찍은 모습



이처럼 문화과학궁전의 이미지도 앞으로의 세대가 어떻게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비록 첫 만남이 좋지는 못했지만, 저 건물이 몇 십 년이고 몇 백 년이고 걸쳐서 언젠가는 '스탈린의 건물'에서 '폴란드인과 함께 살아간 역사적인 건물'로 남겨지기를 기대한다. 조선 총독부처럼 명확한 철거 명분이 생기지 않는 한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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