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쿠프 기행] 어떤 공작의 금품목록

<차르토리스크 미술관>, 폴란드판 간송 전형필 박물관

by 흑투리


'영웅'. 여러분이 생각하는 '영웅'은 어떤 존재인가? 만화로 따지면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과 같은 슈퍼히어로, 좀 더 현실적으로 보면 불의에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이나 '유관순 열사'가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투리는 어떤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기록을 지킨 사람도 역시 '영웅'이라고 본다. 그러한 보물들을 지킴으로써 해당 민족의 얼과 자긍심을 구해낸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의로운 보물 컬렉터' 혹은 '독립운동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도 과거 일제로부터 한국의 문화재들을 지켜온 대표적인 귀족이 한 명 있다. 바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 그분은 그 막대한 재산을 본인의 영위를 위해 쓸 수 있었지만, 문화재를 하나라도 돌려받기 위해 굉장히 많은 돈을 희생하신 분이시다. 투리도 어렸을 때 이 분의 업적을 여러 교과서들을 통해 배웠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도 전형필 선생과 거의 판박이와도 같은 길을 걸어온 인물이 있다. 바로 블라디슬라프 차르토리스크 공작(Władysław Czartoryski)이다. 이분도 폴란드가 여러 국가에 의해 사분오열된 상태였을 때, 폴란드의 여러 문화재들을 모아서 직접 소장관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곳이 이번 글의 주인공인 '차르토리스크 미술관(Czartoryski Gallery)'이다. 현재는 크라쿠프 국립 미술관(The National Museum in Krakow)의 일부로 편입된 상태이지만, 이 박물관 고유의 배경과 가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이 박물관의 이야기, 한 번 살펴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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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크라쿠프에서의 마지막 날. 투리는 발렌틴, 이네즈 등의 다른 동기들과 점심으로 초밥을 먹다가 ESN 위원회의 공지에 따라 박물관 안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거리가 식당과 그리 멀지 않아서, 우리는 10분에서 20분 정도 복도에서 비를 피하며 나머지 일행을 기다렸다.



dd.jpg 대충 전시관 내부 구조에 대한 간략한 표시



곧이어 돌아온 나머지 일행. 우리는 각자의 짐을 한 곳에 모아둔 뒤 본격적으로 미술관 탐방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본 작품들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이 미술관에 대한 소개부터 하겠다. 차르토리스크 미술관은 공식적으로 1878년에 개관한 미술관으로,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들 중 하나이다. 해당 건물이 최초로 지어진 시기는 1796년으로 이자벨라 차르토리스카(Isabella Czartoryska)가 바르샤바 인근 푸와비(Puławy)에서 초기의 작품들을 보관한 것으로 시작했지만, 바르샤바 혁명으로 인한 피해 우려에 의해 작품들은 다시 파리로 급히 옮겨진다. 그러다가 이자벨라의 손자 블라디슬라프가 1870년 그것들을 크라쿠프로 옮겨 지금과 같은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 것이다.



20250323_135051.jpg 미술관에 대한 소개가 담긴 팜플랫.



말은 블라디슬라프가 힘겹게 모아서 지켜놓은 폴란드 문화재 고유의 미술관이라고는 하지만, 폴란드 이외의 세계적인 명작과 유물들도 존재한다. 특히 그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엄청난 작가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 장황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투리의 사진창고를 열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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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중세 유럽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크라쿠프에서의 첫 미술관 방문! 다른 동기들도 관심을 가지며 전시관 내부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차르토리스크의 개인 소장 물품들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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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가 확인해 보니, 해당 전시관에 있는 상당수의 유품들은 차르토리스크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던 물품들이었다. 예를 들면 오른쪽 사진 같은 경우는 폴란드에서 쓰인 칼의 일종인 사브르나 당대 유럽 최고 기사단의 훈장 같은 것들인데, 모두 다 아담 카지미에츠 차르토리스크(Adam Kazimierz Czartoryski)에게 수여한 것들이란다. 여하튼 이런 물건들을 기본 아이템처럼 소지하고 있는 걸 보면, 차르토리스크 가문도 보통 가문이 아닌 건 확실하다.



20250323_141200.jpg 19세기 중반에 차르토리스크 가문의 공작이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사용한 단도



Kermis in the park.jpg Kermis in the park



드디어 서유럽 작품 발견! 단어 'Kermis'란 단어는 벨기에나 네덜란드 등지에서 '바자회'라고 불린다는데, 주로 벨기에나 독일 등지에서 많이 그려진 장르라고 한다. 여기는 전반적으로 가문의 물품들을 다루는 공간인데, 벌써부터 외국(?) 작품을 만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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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다음 방으로 이동하자. 해당 전시관은 전체적으로 과거의 의상을 주로 전시하는 곳 같았다. 일부는 위의 사진처럼 포멀한 의상이었고, 어떤 코너는 전쟁 시 착용했던 복장과 관련이 있었다. 물론 옷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릇이나 다른 용도의 물품들도 보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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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말하지만, 미술관을 마지막으로 완성한 사람은 블라디슬라프 차르토리스크 공작이다. '마지막으로'가 무슨 말이냐? 사실 이 미술관은 3대에 걸쳐 완성되었다. 처음으로 문화재를 모은 사람은 아까 말했듯 그의 할머니 이자벨라 차르토리스카(Isabella Czartoryska)로, 그녀는 폴란드 독립과 민족정체성 회복을 위한 문화유산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지금 투리가 보여주는 사진들 중 폴란드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있다면, 그들 중 대부분이 이자벨라가 모은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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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그녀가 전시한 물품 중에는 ‘기억의 신전(Temple of Memory)’에 전시한 물건들도 있었는데, 그중 가장 처음으로 전시되었던 것은 1683년 빈 전투(Battle of Vienna)에서 터키군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전리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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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박물관 소장품에는 바벨 대성당(Wawel Cathedral), 왕궁(Royal Castle)에서 회수된 보물들과 폴란드 귀족 가문들(szlachta)로부터 기증받은 여러 물품들이 있다고 한다. 마침 위의 왼쪽 사진을 보면, 맨 위쪽에 천 같이 생긴 전시품도 교회의 제단을 장식하는 예술적 장식물이다. 우리가 돌아다니는 미술관도 이렇게 세대를 거쳐 문화재를 아끼고자 했던 가문의 확고한 의지 덕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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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렇게 아래층에 있는 문화재는 모두 살펴보았고. 이제부터는 회화 코너를 감상할 차례이다! 이 이후부터 등장할 전시관에는 세계적인 명작을 비롯해 여러 미술 분야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20250323_143702.jpg Polyptych, Centrepiece. Jacobello Di Bonomo



이 전시관에 있는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2대인 아담 예르지 체르토리스크(Adam Jerzy Czartoryski)가 모아놓은 유명한 예술품들을 비롯해 체르토리스크 가문에서 이제껏 모아 온 폴란드 역사의 방대한 기념품(Collection of memorabilia) 컬렉션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자벨라의 아들인 아담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여러 로마 골동품이나 유명한 작품들을 미술관에 추가했다고 한다. 다만 그의 생은 예술품 수집가보다는 정치가로서의 비중이 더욱 높았다. 그는 폴란드 연방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다가 폴란드에서 추방당하고 마는데, 그 과정에서 해당 물품들을 파리의 호텔에 옮기고 그곳을 미술관의 거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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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안을 보면 확실히 로마와 관련된 문화재들도 많이 보였다. 다는 아니겠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2대가 보관한 물건들이겠지. 사실 투리도 본인이 수집한 문화재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면, 그 물건의 원전은 생각하되 가치에 국적을 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예를 들면 1000년의 역사를 지닌 문화재가 파괴되었다고 하면, 그게 중국, 일본 어느 나라의 것이라 해도 매우 유감스러운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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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위의 작품은 해당 전시관 속 작품들 중 하이라이트 of 하이라이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흰 담비를 안고 있는 귀부인 (Lady with an Ermine)>이라고 한다. 이 미술관을 찾아보면 꼭 함께 딸려 나오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해당 작품은 몇몇 부분에서 손본 흔적이 있음에도 꽤 잘 보존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1490년쯤 작가가 로도비고 일 모로(Ludovico il Moro) 공작 아래에서 일했을 때 지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작품 속 여성은 공작의 연인인 세실리아 갈레리니(Cecilia Gallerani)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애당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그중에서도 이 작품이 돋보이는 이유로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해당 작품에는 인물과 양의 질감이 정교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고, 권위적이었던 당시 시대상을 감안할 때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다 빈치의 예술 작품들이 많지 않은 만큼, 이미 저 작품의 희소성은 상당한 편이다. 생각해 보니, 투리도 다 빈치의 회화들을 많이 들어본 기억은 없다. 그저 그 작가가 유명하다는 것만 알 뿐. 그걸 보면 미술관이 대표 작품으로 저 작품을 홍보하는 것도 납득이 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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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저렇게 로마뿐만 아니라, 폴란드 책이나 작은 폴란드 지방의 물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비록 다른 나라의 작품이 섞이기는 했어도, 근본은 폴란드의 정신이라는 것을 가문은 잊지 않은 것 같다. 아까도 말했듯 2대가 있었던 시절의 폴란드는 나라가 어지러운 형국으로 인해 문화재를 쉽사리 고국으로 옮길 수 없었다. 그래서 19세기에 블라디슬라프가 문화재를 물려받을 당시, 그는 호텔에 지어진 임시 박물관을 열어 폴란드 망명자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면서 수익을 독립운동 지원에 보태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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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슬라프는 러시아 등에게 작품들을 뺏기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미술관을 물려받은 것 이외에도 그는 중요한 작품들을 외교관이나 일부 귀족들의 사적 공간에 분산시키면서 외부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했으며, 그중에는 아까 언급한 다 빈치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그는 유럽 각지의 경매와 미술시장을 돌며 르네상스, 고대 유물, 회화들을 매입해 그것들을 모두 폴란드의 국보로 삼으려 했다. 돈과 목숨을 걸 정도의 노력과 열정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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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블라디슬라프의 철저한 관리 끝에 그의 가문이 대대로 모아 온 작품들은 1894년 안전히 크라쿠프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 뒤 이곳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폴란드의 대표적인 민족적인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결국 이자벨라부터 시작한 보물 컬렉터 가문의 여정이 블라디슬라프에 이르러서야 완벽히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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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보여준 이야기와 작품들이 '차르토리스크 미술관'에 관한 총체적인 내용이다. 가문이 대대에 걸쳐 이름과 목숨을 걸고 지켜낸 미술관.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투리와 ESN 동기들은 위 사진에 있는 귀중한 유럽과 폴란드의 문화재를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바벨 성이든 여기든, 폴란드는 자국의 보물들을 지키기 위해 정말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특히 상대적으로 파괴당한 게 적은 크라쿠프에서 그런 면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전쟁과 분열된 폴란드의 혼란기를 피해 공작의 '금품(禁品)목록'이 되어야 했던 그들의 유산. 결국에는 그들의 의지가 후대에도 이어져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었던 그 수많은 금품들이, 앞으로는 끝까지 개방목록으로 남아 폴란드인의 자긍심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부귀와 영화마저 희생하셨던 전형필 선생도 다시 한번 회상하며, 이번 기행글을 여기서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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