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배기가 맛있어서 죽고 싶어

23.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파

by 해파리

인간의 뇌는 스트레스 상태에 빠지면 코르티솔, 아드레날린 등의 호르몬을 분비해 각성상태를 유지하고 경계 태세를 갖춘다. 단 한 순간의 위험은 사람의 신경을 잠깐 예민하게 만들고 끝이지만 지속적인 학대와 트라우마는 인간의 뇌가 항시 경계 태세에 있게 한다. 뇌는 항상성을 매우 중시하고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유소년기에 지속적인 학대를 경험한 아동은 학대에서 벗어나서도 뇌가 경계 태세에 있게 만들려 한다. 마치 오래 전족한 청나라 여인이 나이가 들어서 전족을 풀자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며 다시 전족하는 것과 같다. 의식적으로 괴로움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행동을 하거나 그런 상황을 연출한다. 애착 형성이 잘 되지 못해 애정 결핍에 허덕이는 사람이 성인이 되어 누가 봐도 별로인 사람들만 만나며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대학 때 만난 절친한 친구가 있다. 같은 교육 전공이었지만 특이하게 그 친구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목자가 되기로 했다. 나이 차이는 조금 나지만 그 친구는 내 글을 좋아했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모아 독서 감상문을 공유하는 모임도 주기적으로 가졌다. 친구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자네는 슬픔을 좋아해.’ 그 말은 단순한 성향 묘사라고 하기에는 ‘어리석게도‘ 라는 말이 생략된 듯한 어조로 말해졌다.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곱씹어 보니 그 친구의 말이 맞았다.

일전에 한 번 정신과에서 의사 선생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마치 비련의 주인공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무언가 슬프고 우울한 일이 생겨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살 리가 없다고 말했다. 잘 치료하면 나아질 거라는 결론으로 귀결됐지만 선생님이 말했다. 비련의 주인공이 못되면 어떡해요? 나는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안 아픈 삶을 사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

그 친구와는 수업이 자주 겹쳤고 과 특성상 글쓰기가 주된 과제인 경우가 많았다. 아예 소설 창작 수업을 함께 듣게 된 적도 있어 그 친구는 내가 대학 때 쓴 글 대부분을 전부 읽어본 사람이 되었다. 친구는 내 글이 비관적인 운명을 자처하는 슬픔 애호가와 같은 면이 있지만 그래서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했다. 나는 글이 재밌으면 큰 목적은 달성한 셈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내 뇌는 그런 의미에서 망가졌다. 너무 오래, 심하게 스트레스 상황을 겪어야 했고 탈 없이 자라나야 하는 성장기에 모든 날들을 맹수에게 쫓기는 영양처럼 긴장 상태에 있어야 했다. 괴롭힘이 존재할 때도, 존재하지 않을 때도 내 뇌는 상시 경계 태세를 갖춰야 했고 과도하게 분비된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인해 내 뇌가 ‘정상적으로 여기는‘ 상태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트라우마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굉장히 어둡고 우울한 오컬트 영화를 보고 나서 기분이 가라앉은 적이 있다. 그때 갑자기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서 이런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걸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신세를 한탄하며 나는 청승맞게 울었고 그 당시 만나던 연인에게 구토하듯 감정을 쏟아냈다. 순진한 연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한숨만 쉬었다. 나중에 연인과 헤어진 것도 대책 없는 내 감정 기복 때문이라 생각하자 자꾸만 우울한 운명을 반복하도록 내 뇌 회로가 설정된 것 같아 또 다시 서글퍼졌다. 비련의 연속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문득 과거 인물들에게 원망이 들 때가 있다. 원망은 작은 슬픔을 동반했다가 때때로 강한 분노를 일깨우기도 한다. Adhd 검사를 위해 풀 배터리 검사를 시행하고 소책자로 내 정신에 대한 보고서를 보며 나는 꽤 감동받았다. 그렇게 질곡의 삶이었는데 나 참 좋은 사람이구나. 지금까지 이만큼 해내느라 정말 고생했겠고 너무 기특하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인데 그때 날 괴롭히던 그것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훨씬 더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아주 잘 살고 있지 않았을까? 내 삶을 망친 게 내가 아니라 외부의 것들이라는 생각에 몹시 화가 났다. 하지만 때늦은 분노는 결국 체념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래도 신경 가소성이라는 개념을 접하고 조금 더 희망적으로 살 생각을 했다. 성장기 이후 뇌가 고정된다는 이전의 학설과 달리 최근 뇌과학의 발달로 뇌가 평생동안 계속해서 변화하며 재생하고 성장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뇌의 이러한 영구적인 발달과 변화 가능성을 신경 가소성이라 한다. 뇌를 털실뭉치에 비교하면 보통 사람의 뇌는 적당하게 잘 감긴 털실뭉치다. 하지만 내 뇌는 복잡하게 꼬이다 못해 어떤 꼬임이 선행하고 후행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한 털실뭉치일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씩 손에 닿는 부분부터 풀고자 하면 얼마든지 풀리며 다시 새로 감을 수 있다. 물론 풀기 어려운 꼬임도 있을 것이고, 다 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꼬임뿐인 지난 날에도 나는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남았고 여기까지 왔다. 조금 더 풀린 꼬임뭉치로 사는 것은 과거보다 더 수월할 것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내게 희망을 준다. 죽고 싶다고 염불을 외는 사람이 희망을 좇는다는 게 역설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죽고 싶어하는 마음 안에 내 남은 자아의 한 조각은 죽고 싶지 않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찾는다. 그 조각이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라며 지금도 꾸준히 치료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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