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헌
내게 가장 괴로운 시기는 2월이다. 2월은 보통 봄방학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끌려가듯 나가야 했고 새 학년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진다. 지금도 종종 하는 말이지만, 만약 학생 때로 돌아간다면 언제든 간에 나는 자퇴할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이 내게 안정감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에 나가기 싫었다. 우울증이 그때도 있었을 것이다.
족쇄에 묶인 것 같은 시간이 지루하게 지나고 4학년이 되었다. 난 우악스럽고 거친 남자 초등학생들 중에 누군가 날 괴롭히지 않을지 항상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다.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책이나 어린이 신문을 읽고 있었지만 마주치지 않는 동공 주변의 흰자위로는 항상 경계상태에 있었다. 당연히 항상 에너지를 소모하며 집에 오면 녹초가 되었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상태가 되었다. 학원에 가는 것도 귀찮았고 집에서 숙제를 하는 것도 귀찮았다.
4학년 때 뒷자리에 앉은 아이를 헌이라 하겠다. 헌은 살이 살짝 오른 전형적인 장난꾸러기 초등학생이었다. 가끔은 주먹다툼도 일으키고 체험학습 때 사지 말라는 것을 사기도 하는. 그게 칼이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께 압수당하게 되었다. 거칠고 폭력적인 성향이 헌의 내면에 있었던 것 같다.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학급자리를 자주 바꾸는 편이 아니었다. 80년대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엄격한 남자 선생님이었고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의 자리는 거의 고정되었다. 그리고 난 그걸 철저히 저주하게 되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였던 우리들은 한 학급에 45~50명 정도로 책상을 다닥다닥 붙여 앉아야 했다. 그때는 그게 좁은지도 모르고 무거운 가방도 걸고 외투도 걸었다. 덕분에 맨 뒷자리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지 않던 헌은 심심할 때 고개를 들면 내 등을 볼 수 있었고 자주 툭툭 치곤 했다. 처음에는 아플 정도가 아니었지만 매우 귀찮았고 수업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말 대신 그만하라는 손짓을 했다. 헌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수업 시간에 너무 튀지 않기 위해 그냥 반응하지 않았다. 재미가 없어졌는지 헌은 힘을 실어 내가 고통스러워할 정도로 찌르거나 주먹으로 세게 때렸다. 아파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헌은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다. 공부도 싫고 수업 시간이 지루해 미치겠는 초등학생 입장에서 나는 유일한 낙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헌은 한 학기 동안 매시간 매번 내 등을 아프게 때렸다.
고통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내 학교 생활은 다시 괴로워졌고 학교에 가기 싫은 이유가 또 생겨버렸다. 헌은 내가 반항할 수 없는 수업시간을 이용해 날 괴롭혔고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끙끙대며 버텼다. 그게 헌에게는 놀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괴롭힘이었지만 가해자 입장에서 그게 중요할 리가 없다. 헌은 한 학기 동안 집중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 기쁘게 임했고 나는 다시 병들어 갔다.
가해자들은 하나 같이 공통적으로 ‘반항할 수 없는 상황’을 찾아내고 그것을 십분 활용했다. 헌은 수업 시간 내내 꼼짝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나와 같다는 것을 알고 그 시간을 이용해 날 괴롭혔다. 남을 괴롭히는 데 머리가 돌아가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담임 선생님에게 헌이 괴롭히고 있으니 자리를 바꿔달라고 하면 꽤 빠르게 해결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친절히 굴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3학년 때 무의식에 생겨났는지, 또 완고한 담임 선생님이 날 비난할까봐 두려웠는지 만 9살의 나는 적극적으로 나의 힘듦을 알리지 못했다. 어떤 장난기 심한 남자애가 반 아이들이 모두 둘러 앉아 음악 수업을 듣는 중에 음악선생님의 지목으로 반 아이들 중심에 홀로 선 내 바지를 확 내려버린 적이 있었다. 아이들 모두 숨을 삼키며 놀랐고 나도 너무 놀라 얼른 바지를 추슬러 입었지만 너무 큰 충격에 몸이 언 것처럼 삐걱였고 눈물이 고장난 것처럼 나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도 음악 선생님은 못 본 척 수업을 진행했다. 음악 시간이 지나고 담임 선생님이 돌아왔을 때 한 아이가 음악 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노라 하고 내 이야기를 전했다. 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듣고 나는 담임 선생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 기대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단칼에 그 아이의 말을 자르고 당사자가 직접 와서 이야기하라며 돌려보냈다. 내가 그 아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눈앞에서 일어난 그 반응은 3학년 때의 어른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결국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혹독하게 깨달았다.
어느 날 5교시 헌은 밥을 먹고 나른했는지 나를 주먹으로 때렸고 등의 급소를 정통으로 맞은 나는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하필 앞줄부터 순서대로 발표하다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울면서 일어나 교과서를 읽었다. 헌은 몹시 당황해 갑자기 나를 달래며 ‘그렇지, 잘 할 수 있어!’라며 스포츠 코치처럼 내가 발표를 할 때 어색한 응원을 했다. 어찌저찌 짧은 발표를 끝냈고 나는 바로 앉았다. 헌은 잘 했다며 내 어깨를 털어주며 이상한 어조로 격려했다.
자기가 날 때리는 것을 들킬까봐 당황하며 날 달래던 헌의 모습도 우스웠지만 내가 울면서 일어나 발표를 하는 데도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넘어가던 담임 선생님의 반응이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 교사 입장에서 선생님을 되돌아보면 선생님은 내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 직접 알리길 바란 것 같다. 위 일 말고도 여러 방식으로 수동적인 신호를 많이 보냈지만 선생님은 거의 일부러 그 모든 신호를 무시했다. 그게 선생님의 교육 방침이었던 것 같다. 2학기 미술 시간에 주변 애들이 자꾸 찰흙을 던져대며 장난을 쳐서 짜증이 난 나는 선생님에게 애들이 찰흙을 던진다고 일렀고 선생님은 꽤 적극적으로 ‘누가 (감히) 찰흙을 (너에게) 던집니까?’라며 반응했다. 그걸 생각하면 선생님은 헌에게 괴롭힘 당하고 있던 내 상황을 알고 있었고 내가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반응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논리의 층위에서 선생님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난 결국 버려진 기분으로 방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나름의 방식으로 도움의 신호를 보낸 것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무시당했다는 비참함과 함께 조용히 내 안으로 사그라들어갔다.
헌에게서 벗어난 것은 헌이 이민을 가게 된 이후였다. 어느 날 갑자기 헌의 집은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고 이민 전학을 가기 열흘도 채 남지 않은 시기에 그것을 알려왔다. 헌은 꽤 놀랐는지 매우 침울한 상태로 조용히 학교에 엎어져있었다. 음악 시간에 헌의 이민 사실을 알게 된 음악 선생님은 평소 수업 태도가 좋지 못했던 헌을 두고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헌은 그 말을 듣고 하루 종일 우울해하며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교사로서 하면 안 되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에 무언가 시원한 듯, 신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헌이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민 가는 비행기가 사고가 나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헌이 이민을 가고 나서 난 해방감과 후련함을 느끼며 편히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학교는 가기 싫었지만 적어도 고통스러울 일은 없었던 것이 좋았다.
나중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식장에 헌이 온 것을 보았다. 헌은 4학년 담임 선생님과 웃으며 졸업식을 보고 있었다. 아마 잠깐 한국에 왔거나 다시 돌아온 헌의 부모가 마지막 담임 선생님이었던 4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했을 것이고 헌도 졸업식에 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나 보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어찌 됐건 헌을 보며 웃는 4학년 담임 선생님의 모습은 참 보기 싫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같은 초등학교 학생이라는 소속감 없이 어색해하며 뒤에 혼자 서 있던 헌의 모습이었다. 나와 다른 세계에, 외톨이처럼 떨어져 있는 헌의 모습은 알 수 없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