志在有徑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한 건 순전히 충동적인 일탈이었다. 적잖은 나이에 적당한 회사에 다니면 나도 사는 것이 적당히 어려움 없다. 특별한 계기를 찾기에는 매일이 녹초였고 몸서리치게 내일을 두려워했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사니까.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남자친구는 나의 뜬금없는 해외 행에 마치 이별을 통보받은 듯 무너졌다. 그를 보며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대로 코너로 몰리면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내민다. 그런 그가 나는 좋았고 한편으로는 혹여나를 등진다 해도 미련 없이 보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직장에서는 형식적으로 나를 한번 붙잡는 듯했지만 사표수리는 깔끔히 끝내주셨다. ‘너 말고도 사람은 많아’라는 소리겠지. 그건 언제든지 내가 소모품으로 갈아 끼워질 수 있을 만큼 일회용 적인 인간이었다는 소리겠지. 아니면 그저 그런 정도의 능력으로 여태 버틴 것 일 수도 있고.
부모님도 당연히 노발대발하셨다. 3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 시집을 가도 모자를 시기에 외국으로의 도피라니.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실 수 없는 것은 알았지만 이 상황에서 시집을 운운하는 고전적인 생각에 한숨이 나왔지만, 부모님 세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애초에 무리니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다.
우리나라와 반대되는 계절의 뉴질랜드를 택한 것도 막연한 관심 정도였다. 물가니 치안이니 취업 여건이니 이런 건 따지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태양에 반짝이는 해변의 파도가 내 마음을 부슬 것 같았다.
매너리즘....
한마디로 요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의 행보가 너무 격렬하다. 나는 왜 이 계절에 적응하지 못한 것일까.
‘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 어차피 지나면 가벼운 일들이야. 선택하면 끝인 거고. 별다를 것도 없는 결과들이야. 그냥 그렇게 심플하게 생각해 봐.’
그러나 어떻게 세상 일이 그렇게 잔잔한 결론을 내어주겠는가. 고통의 감내는 묵묵히 곱씹지 않아도 쓴데. 적잖이 씁쓸한 커피는 좋아하지만 시련과 실패 혹은 인생에서 스스로 외면받는 삶을 사는 것은 몸서리치게 싫었다.
이전에 대세이기도 하고 취미 삼아 단기 속성으로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 두었다. 일단 이를 이용해서 뉴질랜드에서 자리 잡아 볼 생각이다. 누구든 해 내고 있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냥 30대의 패기도 아니다. 이제는 다른 인생의 노련함을 얻고자 아등바등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기대이다.
오늘은 날씨가 미치도록 화창해 마음이 아스라질 정도이다. 나는 여전히 카페에서 버벅대며 손님을 앞에서 기다리게 한다. 스스로 ‘침착해’는 수백 번 외치고 손님에게 ‘sorry’를 연신 해댄다. 영어도 부족하고 속도도 부족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내 몸뚱이가 버거워지는 날들이 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여기 왔을까... 과거의 영광처럼 한결같던 날들이 그립다. 예전에는 시간에 묻혀 살았다면 지금은 시간에 버거움을 느끼며 따라가기 벅차게 살아가고 있다.
벌써 계절은 겨울을 치달아가고 이 추위에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작열하는 태양이 반기는 고국으로 가고 싶다. 향수병일까? 같이 일하던 프랑스 친구가 나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며 말했었다. 그럴지도... 하지만 그러기에 내가 너무 정체되어 있다.
일을 끝내고 비싸지만 다른 카페에서 커피를 하나 테이크 아웃하여 공원 벤치에 앉았다. 멍하니 일렁이는 윤슬을 바라보며 따뜻한 공기를 느껴보려 애썼다. 가을의 우아함과 겨울의 포근함을 느끼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광활하게 춥다. 인생의 방향을 잃은 느낌이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나는 쉽사리 포기했을까. 가지고 있었던 것이 고귀한 것임을 왜 모르고 나는 좀 더 버티지 못했던 것일까. 후회라는 것이 밀려올 때쯤 메시지가 울렸다. 같이 일하는 프랑스 친구였다.
‘오늘 저녁 같이 하지 않을래? 거기 치킨 파르마에서 보자.’
오늘 잦은 실수로 울적했던 나를 달래주려는 것인가. 인류애가 느껴질 때라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기댈 누군가가 필요했다.
식당에 먼저 도착해 있는 그녀가 손짓함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마주 앉은 그녀는 내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건네며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다.
‘저기... 너 워킹 홀리데이 기간 다 채울 거니?’
그녀의 물음이었다. 갑자기 약간의 울컥함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나약해 보였나.
‘응 채워야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채워나갈지 마음음 정했어?’
‘어?’
‘남은 4계절을 이겨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냐고. 너 요즘 온통 겨울이야. 아시아인이 영어 하는 것, 날씨가 다른 이곳에서 적응하는 거 쉽지 않겠지. 하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야. 모두들 각자의 이유로 힘들어. 네가 어떤 마음을 먹고 이곳에 왔는지 싶지만, 지나온 삶이 어찌 되었든 우리는 내일을 위해 여기 모였어. 너도 네가 꿈꾸는 내일이 있을 것 아니야.’
바보 같았다. 지금은 영 나의 계절이 아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 다른 변화를 위해 왔지만 변화되는 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슬픔을 온전히 삭히는 것에 집중하고 살았나 보다. 앞날을 위해 달렸는데 정작 뒷날을 바라보며 버티고 있었나 보다. 대단한 이야기도 심금을 울리는 단어도 아니었는데 나의 생각의 오류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나는 여태 누군가의 계절에서 살아왔다. 부모가 원하는 계절, 회사가 원하는 계절, 주변 시선들이 원하는 계절 속에서 나의 헛헛함을 다독이며 그 계절을 온전히 받아냈다. 지금은 머나먼 타국에서 타국의 언어와 문화와 차별과 부적응을 온몸으로 받지만 계절은 정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 아닌지.
누구든 봄날을 꿈꾼다. 나도 그러했다. 막연히도 바라왔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봄날을 위해 준비해야 할 때다. 부족한 언어공부도, 카페 일도...
사회는 냉혹하다. 그 냉혹함에서 나는 묵묵히 나의 봄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냉혹함에 눌려 있다면 그대로 나는 사장된다.
지금은 누군가의 계절이다. 여태 그래왔지. 하지만 이제 나도 내 봄날을 맞이해야만 한다. 어둠은 곳 빛이 있을 것이라는 증거, 봄꽃은 피기 전 가장 볼품없이 작지만 피우기만 하면 누구보다 화려하게 작렬함을 내보인다. 나도 내 인생의 항로를 정하여 나의 봄날을 준비하려 한다. 언제든 맞이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