首丘初心
의사: “무함마드 씨? 혹시 한국어 할 줄 아세요? 아니면 영어 할 수 있어요?”
무함마드: “한국어 쪼큼 알아요. 영어도 쪼큼 알아요. 벵골어 알아요?”
의사: “하아... 어렵네요. 저는 벵골어를 모르거든요. 통역이 필요하겠네. 혹시 한국어 잘 아는 친구 없어요?”
무함마드: “친구? 없어요. 친구들 다 나빠요. 한국 친구들 나빠요. 나 괴롭혀요.”
의사: “그랬군요. 어떻게 괴롭혔는데요?”
무함마드: “내가 안 훔쳤어. 니가 훔쳤지? 아니! 아니야! 너 훔쳤지?”
의사: ‘혼잣말하는 건가? 정신건강의학과 협진(consult) 해야 하나?’
“무함마드 씨, 일단, 우리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지나가던 행인이 몸이 아프신 것 같다고 신고해서 119타고 온 거잖아요. 기억나요? 우리 검사 음... checkup 좀 합시다.”
무함마드: “checkup? why? 나 돈 없어요. 선생님 나 돈 없어요.”
의사: “혹시 또 아프면 지금처럼 또 병원 와서 돈 들어요. 그럼 무함마드 씨 어떻하려고 해요? 혹시 일 해요?”
무함마드: “공장에서 일해요. 나 일해서 돈 벌어서 가족 줘요. 나 병원비 돈 없어요.”
의사: “그럼 무함마드 씨는 뭐 먹고살아요? 돈이 있어야 사 먹잖아요. 밥은 잘 먹고 다녀요?”
무함마드: “밥 조금 먹어요. 밥 많이 안 줘요. 돈 내 돈 내해요. 무슨 말 인지 몰라요...”
의사: “밥도 잘 안 챙겨 먹고 그래서 쓰러진 건지, 머리가 아파서 쓰러진 건지 우리도 알아야 치료해요. (간호사를 쳐다보며) 의료사회복지팀 협진 내야겠어요. 뭐 결정을 해야 나도 뭘 하지.”
무함마드: “아니요, 나 돈 못 내요. checkup 안 해요!”
간호사: “네. 안내드릴게요. 무함마드 씨 저 따라오세요. fallow me.”
내가 처음부터 아프고 힘들었던 건 아니다. 10년 전 한국행을 결심했을 때는 건강했고, 20대 초반으로 젊었다. 그리고 마음도 단단했다. 가장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이곳은 너무 낙후되었고, 난 내 자식에게 빈민촌 생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으레 부모의 마음이지 않을까. 알라신이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일 것이다. 스스로 이 굴레를 개척해야만 하는.
나는 가난했지만 따뜻한 부모님 아래서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빈민촌 생활의 시작이었고, 부모님은 무식하리만큼 성실했다. 아침에 쓰레기 더미 속에서 쓸만한 것들을 가족이 함께 주워 빨아 팔고, 어머니는 길가에서 손수 만든 수공예품을 곁들여 팔았다. 아버지는 매번 일거리를 찾아 거리로 나갔고, 저녁에는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셨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게 사랑을 주며 건강하게 자라라고 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적응한다고 그래도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아름다웠고, 해 질 녘 가족과 함께 물건을 정리하며 쳐다본 하늘은 눈물나리만큼 붉게 물들어갔다. 없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없는 집안사람이지만 16살에 동갑 소꿉친구인 무나와 결혼을 했다. 결혼이라고 해 봐야 가족들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것이다. 그녀 또한 우리 가정의 삶과 다름없이 살았다. 이곳은 늘 가난에 쩌들었지만 아이들은 더없이 티 맑았다.
나도 18살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20살에 둘째도 얻었다. 처음에는 부모처럼 폐물 수거 판매를 하다가 더 이상 이 수익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 무나가 너무 힘들어했다.
무나에게 멀리 나가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말했다. 무나는 도시로 나가서 돈을 버는 줄 알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 생각이었다. 일단 도시에 가 보자. 일을 찾자!
하지만 배운 것 없고, 기술 없는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인력수거를 기다리는 폐물이 된 느낌이었다.
근데 우연히 옆에 앉아있던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 가서 5년만 딱 눈 감고 일하면 평생 먹고살 돈 벌 수 있대.’
평생? 나는 그 말에 온몸이 떨렸다. 한국... 비행기 값이 얼마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갈 수 있을까?
오늘 일을 얻진 못했지만 나는 일을 얻은 듯 기뻤다. 집으로 가서 잠자리에 들기 전 무나에게 한국행에 대해 물었다. 무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에게, 처가에 돈을 빌리고 가진 돈 중 아내가 자녀들과 먹고 살 약간의 돈만 남기고 나는 한국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어렵게 F-4 비자(VISA)도 받았다.
난 출국 전 아내에게 돈 많이 벌어 다 같이 모여 행복하게 살자고 했다. 그러기 위해 조금만 참아달라고. 아내는 내게 손수 만든 따뜻한 식사를 주었고, 나는 지금도 그 식사의 맛과 향이 아직도 느껴진다.
한국에 와서 일을 나섰지만 막막했다. 이래저래 물어보다가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소개받게 되었다. 더러 방글라데시 사람들도 있어서 동지애를 느꼈고, 도움 끝에 어느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이 힘들었다. 하지만 잠도 재워주고 밥도 주었다.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견딜 만했다. 하지만 다들 비자연장에 대해 걱정했다.
‘무함마드, 첫 월급 받은 거 많아 보이지? 여기 물가 비싸. 그거 많은 거 아니래. 박총무가 그랬어. “
그래도 좋았다.
이 돈을 자식들에게 내 사랑에게 보낼 수 있다. 나는 첫 월급 150만 원 전체를 아내에게 보냈다. 친구의 전화를 빌려 아내와 통화했다. 아내는 돈보다 내 걱정을 했다.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나서 전화를 오래 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아내에게 안기고 싶었다.
2년의 비자(VISA)가 끝나도 난 한국에 남았다. 아직 돈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일 할 수 없어 사람들의 정보를 통해 지방의 농사일을 돕는 곳으로 갔다. 이제 나는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무나는 이런 사항을 잘 몰랐다. 그녀는 글을 모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알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평생 안 힘들고 안 괴롭고 서러움 없이 살 수 있는 돈, 난 우리 가족이 모이기 위해 돈을 벌고 있었다.
첫째가 드디어 돈을 내고 학교 다니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뻤다. 그 사이 나는 익숙지 못한 업무 탓에 여러 번 낫에 손을 베어 찢김과 흉터가 생겼다. 당연히 병원에 못 갔다. 친구들이 약국에서 사 온 약으로 해결해 주었다. 당연히 흉터는 흉물스러웠지만 난 그래도 여전히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몇 달째 사장님이 돈을 주지 않아 나는 결국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다. 아내에게 처음으로 번 돈을 다 주지 못했다. 방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은 방 한 칸을 구해 염전에서 일했다. 여름에는 너무 바빴다. 힘들었다. 겨울에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양말공장에 다녔다. 거기서 손가락을 하나 잃을 뻔했다. 나의 어려움을 알고 교회 목사라는 분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는 병원에 데려다 주셔서 돈 걱정 없이 치료받았다. 나는 그분에게 감사를 표했다. 갑으로 했는데 못 갚았다. 괜찮다고 하셨고, 아프지 말라고 하셨다. 아프면 방글라데시 다시 가야 한다고 이야기 주셨다.
그 사이 돈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사기도 당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일 할 수 있기에 열심히 일했다, 근 10년을 오직 자식과 무나를 생각하며 일했다. 이제 아내의 마지막 식사 냄새가 잊히려 한다.
이명이 들리고 종종 어지러웠다. 같이 일하던 필리핀 친구가 날 걱정해 주었다. 뭐 좀 먹고 일하라고. 사장님도 일단 며칠 쉬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돈이 안 나오잖아...
이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어지러웠다. 돈 때문인지 가족 때문인지.... 적어도 나 스스로를 위한 것조차 못 챙기고...
집에 가는 길에, 그래 오늘은 저녁을 좀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제일 싼 라면 하나를 편의점에서 골랐다.
편의점에서 나와 맞은편을 바라보자 농후한 노란색의 벼들 위로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풍족함을 꿈꾸던 미래일까, 가족일까, 돈일까....
노을이 내 눈 위로 내린다. 한 가닥의 노을빛이 닫힐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