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훈련을 받고 1주일 만에 출근한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와~ 환성을 질렀다. 얼굴이 그을고 머리가 짧아진 선생님이 교탁 앞에 서더니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보고 싶었다.”
새하얀 칼라의 여고생들은 꺄~ 하고 양손을 얼굴로 가져가고 손으로 입을 막기도 했다. 친구는, 눈물이 났다고 했다. 자기도 선생님이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니 저한테만 한 말도 아닌데 왈칵 눈물이 솟구쳐 책상 위에 올려놓은 가방 아래로 머리를 푹 숙였다고 했다.
공립 학교라 담임으로 나이 든 여선생님만 맞다가 3학년 때 처음으로 30대 중반의 남자 선생님이 되자 친구는 정말 좋았단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고3임에도 교실은 활기가 넘쳤다. 공부는 알아서 하는 거고, 하며 면학 분위기를 잡는 대신 아이들은 젊은 선생님과 함께 재미를 잡으려 했다.
고3 담임으로 젊은 남자 선생님을 배정하는 건 위험한 일일지 모른다. 젊은 남자 선생님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입시 준비에 매진해야 할 정신이 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남자 선생님들 반의 수업 분위기는 대체로 산만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선생님을 온통 늙수그레한 사람들로만 채우랴. 우리는 좋기만 했다.
성은 강이요 별명은 강뚱. 씨름 선수, 강호동 씨만 한 체격에 딱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우리 옆 반이자 국어 담당인 강뚱 선생님은 인기가 아주 많았다. 이유는 첫째, 젊고 둘째, 남자고 셋째, 고리타분하지 않아서였다.
국어 시간에는 아무도 조는 사람이 없었다. 금방 도시락을 까먹은 다음이라도 ‘깨어있는 정신’이었다. 학창 시절에 공부보다 노는 걸 더 좋아했을 것 같은 강뚱, 지루한 건 못 참았을 것 같은 강뚱은 본인만의 방식으로 수업을 이끌었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재미를 느끼도록 야사도 마음대로 각색했다.
황진이의 시조를 배울 때는 배경 지식을 알려주는 차원으로 서화담과의 만남에 대해 상상을 가미한 창작을 들려주기도 했다. 황진이가 서화담을 유혹하기 위해(선생님은 ‘꼬시려고’라 했다) 일부러 비에 젖은 한복을 입고 나타났다는 얘기에 아이들의 몰입도가 얼마나 높아졌겠는가. ‘팔이나 다리도 슬쩍슬쩍 내보였겠지.’ 하는데 밥을 두 그릇 먹었더라도 졸고 있을 사춘기 여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침도 못 삼키고 선생님만 쳐다봤다. 참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고전 시가도 현대어로 쉽게 풀었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 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낫다니”
성삼문의 시조다.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뜯어 먹은 일을 두고 그건 누구 땅에 났냐, 죽으면 죽었지 그걸 왜 먹냐, 라고 비야냥댔다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성삼문은 신숙주와 함께 열세 번이나 요동 땅을 다녀왔다고 한다.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이 그곳에 유배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정확한 음운을 배워 한자음을 우리 말로 정리한 ‘동국정운’을 편찬했다. 선생님은 ‘성삼문이 요동 열세 번 갔다 온 뒤’라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그 전후 음운의 차이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한글 창제 초기 한글의 자음을 모아 설명하신 것이 생각난다. 아, 설, 순, 치, 후음으로 가캉(ㄱㅋㅇ(꼭지 이응)), 다탄(ㄷㅌㄴ), 바팜(ㅂㅍㅁ), 자차(ㅈㅊ), 아하(ㅇ,ㅎ)라 외웠다. 반설(ㄹ), 반치(△)도 있었고. 문득 떠오르는 ‘구두부자(ㄱ,ㄷ,ㅂ,ㅈ)’는 뭐였을까? 선생님이 구두 부자라 말한 건 생각나는데 어떤 공통점으로 묶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구두 부자라니, 괜히 구두를 바리바리 싣고 허둥지둥 피난 가는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강뚱 선생님은 ‘눈 불타, 몸 튼튼, 피부 생생’을 청춘의 3요소라고 했다. 선생님도 청춘이라 몸이 튼튼해선지 열변을 토하면 침이 튀었다. 국어 시간이 끝난 뒤 맨 앞자리에 앉았던 미형이가 우리에게 제 시험지를 보여주었다. 모의고사를 본 다음이었는데 문제 풀이할 때 선생님의 침이 자기 시험지에 튀어 떨어졌다는 것이다. 볼펜으로 동그라미 해 놓은 곳의, 젖었다 말라가는 자국이 보였다. 우웩, 할 일인데, 우리는 사춘기. 그냥 웃음이 터졌다.
강뚱 선생님은 고 3을 맡기에 좀 부족했는지 모른다. 경력이 일천해 쌓인 실력도 적은지 가끔 실수도 했다. 화려한 말솜씨로 얼버무리려 했지만 우리도 알 건 알았다. 고 3 담임이 처음이라 판단을 잘못했다며 첫 입시에 실패한 친구에게 미안해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선생님은 팍팍한 고3 시절에 우리를 웃게 해주어서 좋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던가. 한 남녀 듀엣 가수가 신인으로 나와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강뚱 반이었던 친구가, 그 그룹의 남자 가수가 강뚱의 동생이라는 게 아닌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바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가요 프로그램 방영 시간에 맞춰 TV 앞에 앉아 그 가수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나왔다. 보니까 정말 그 남자는 선생님과 많이 닮아 있었다. 선생님을 뵌 듯 반갑고 감동이 되었다. 내가 직접 만난, 잘 아는 선생님이 TV에 나오는 유명한 가수의 형이라니 신기하고 놀라워서였다.
여자 가수의 음색은 아주 맑았다. 주로 남자가 작사, 작곡한 그들의 노래는 모두 인기 가요가 되어 널리 불렸다. 거리에서도, 버스에서도, 찻집에 앉아있거나 밥을 먹다가도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쉽고도 시적인 노랫말로 상도 받았다. 두 사람이 결혼해서 팬들도 좋아했지만 몇 년 뒤 그들은 이혼했고 듀엣은 깨어졌다.
결혼을 하고 남편의 큰 형님댁에 갔을 때다. 내 고향에서 근무하시고 내가 나온 고등학교를 아는 시숙이 강뚱과 3학년 때 영어 선생님 이름을 대며 그분들께 배웠느냐고 물었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근처에 사는 시숙은 그분들과 내 모교의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같이 친다고 했다.
우리 학교는 시립이었다. 시내 한복판에 있던 학교를 시에서 다른 용도로 쓰려고 시 외곽에 새로 학교를 지어 옮겨가게 했다. 2학년 2학기부터 새 학교로 등교했으니 양쪽 학교에 담긴 추억의 양은 반반 치킨과 같다.
새 학교는 이전 학교보다 부지가 넓고 시설이 좋았다. 책상, 걸상도 신형의 새것이고 바닥도 깔끔했고, 층마다 수세식 화장실을 두었으며 방송 시설도 최고급이라고 했다. 덕분에 화장실도, 방송 기기도 고장이 잦았다. 좋다는 건 예민하다는 뜻이며 그런 건 고장이 잘 나는 법이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푸세식 화장실은 고장이 없으나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은 곧잘 탈이 난다.
맑은 날이면 학교를 둘러싼 산들 사이로 흰 구름이 평화롭게 흘러갔다. 교사 뒤로는 작은 동산이 있어 사철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녔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점심시간에 그곳에 가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고는 없이 해맑은 꽃들의 얼굴에 크고 작은 걱정에 붙들린 내 모습을 비춰보곤 했다.
운동장 가운데는 잔디를 깔아 전체 조회도 하고 체육도 하고 ‘세계 민속 무용 경연 대회’도 펼쳤다.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지 않을 때는 들어가도 되었지만 자주 들어가 다리 뻗고 앉아있거나 누워있을 만큼 마음이 한가롭지는 못했다.
운동장 가에 있는 테니스장은 아주 넓었다. 혼자 연습할 수 있는 벽도 있고 매끈한 초록색 바닥이 햇볕 아래 선명했다. 운동장에서 체력장 연습만 했지 테니스를 배우지 못한 우리는 체육 시간이나 집에 가는 길에 책가방을 들고 그 옆을 지나며 이렇게 잘 닦아놓고 대체 누가 치라는 것이냐고 툴툴거렸다. 장차 내가 결혼할 사람의 형이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과 함께 거기서 테니스를 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숙의 입에서 강뚱이 나올 줄 어찌 알았겠는가.
갑자기 소환된 선생님들의 이름에 얼마나 놀랐던지. 나야 당연히 기억하지만, 전교 1등 한 아이라도 십 년 가까운 세월 뒤에는 잘 기억나지 않을 텐데, 흔한 이름에 지극히 평범했던 나를 선생님들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1학년 때도 가르치셨던 영어 선생님께는 몇 차례 번호로 불려 영문 해석이나 어떤 답변을 했었다. 강뚱 선생님께는 이름이든 번호든 한 번도 불려본 적이 없다. 국어 과목은 호명해서 물어볼 게 없어서였는지. 세월이 충분히 흘러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어떤 학생이었는지 시숙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아이 키우고 주부로 사느라 선생님들을 찾아가 인사할 생각은 못했다. 인연의 거미줄은 넓고도 넓게 퍼져있어 언제 어디서 나를 포획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았다.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한쪽 팔이 잡힌다면 칭칭 감기는 대로 그냥 놓아둘밖에.
깨어진 듀엣 그룹의 여자 가수는 노래를 놓지 않았다. 예전 같은 인기를 누리지는 못해도 노래를 직접 만들어 부르고 가르치기도 하며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남자 가수, 즉 선생님의 동생은 오랫동안 노래를 떠나 살다가 몇 년 전에 새로 발표회를 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사이좋던 때 나란히 앉거나 서서 차분하게 불렀던 맑은 노래들을 흥얼거려 본다. 노래 사이로 교실 안의 강뚱 선생님도, 철부지 여고생들의 모습도 보인다.
조용한 열정을 노래하던 가수들도 잘 계시니 가수의 형님도 여전히 청춘의 3요소를 갖추고 건재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