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혜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새 반으로 향했다. 혜유는 올해 전교 부회장으로 뽑힐 정도로 교내 내에서 꽤 유명하다. 혜유의 팬클럽 마저 생길 정도로. 오죽하면 무슨 기념일마다 혜유의 책상이며 사물함은 온통 선물로 가득했다.
혜유가 반에 들어가자 반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온통 혜유에게로 향했다.
혜유야, 너도 이 반이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나 진짜 너랑 같은 반 되고 싶었어.
이번에 부회장 된 거 진짜 축하해.
나 알아? 저번에 같은 동아리였는데!
혜유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혜유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나하나 대답을 해줬다. 그러고 나서야 책가방을 정리할 수 있었다. 혜유가 주머니에서 젤리 하나를 꺼내 먹으며 뒤를 돌아보는데 그런 혜유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연정이 흠칫 놀라 서둘러 다시 풀고 있던 문제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유는 그런 연정의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
".. 어, 안녕."
"넌 이름이 뭐야?"
연정은 말없이 자신의 명찰을 가리켰다. 혜유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연정이구나? 만나서 반가워. 나는 신혜유라고 해."
"알아, 이미."
"아.. 그래? 아무튼 우리 친하게 지내자!"
연정은 혜유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마저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혜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머니에서 젤리 하나를 꺼내 연정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이거 정말 맛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젤리야."
"난 괜찮아. 단 거 먹으면 집중력 떨어져서."
"정말? 그럼 넌 젤리 안 먹어?"
"어."
"그래도 받아주기만 하면 안 돼?"
연정은 젤리를 가로채듯이 받아 들고 이번엔 아예 혜유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귀에 이어폰까지 꽂았다. 혜유가 당황하며 어버버 거리자 주변에서 보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혜유에게 다가왔다.
신경 쓰지 마, 혜유야. 쟤 원래 저래.
혜유 너랑 쟤가 같은 급은 아니잖아, 솔직히.
그러지 말고 우리랑 놀자. 응?
혜유는 그런 학생들을 바라보며 주저했다.
"그래도.. 같은 친구잖아.."
그 순간, 조회를 알리는 종이 울리며 학생들은 모두 자리에 하나 둘 앉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교실에도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사고 치지 말고, 나 누군지는 너네들 다 알 거고. 내년이면 너네 고등학생이니까 공부 좀 해라 자식들아. 조회 끝. 궁금한 거 있음 교무실로 와.
조회를 한건지도 모를 정도로 조회는 금방 끝났다. 학생들은 혜유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도착해 학생들은 화장을 고치며 자기네들끼리 연정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김연정 걔, 정말 재수 없지 않냐?
그니까.. 공부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맨날 공부하는 척 해.
레알 ㅋㅋ 진짜 역겨워.
쟤랑 같은 반 된 거 진짜 극혐이야..
그 시각 혜유는 혼자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연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혜유의 뒤쪽에 있던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연정이 나왔다. 연정의 모습을 본 다른 학생들이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을 했다. 연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화장실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연정의 뒤를 혜유가 서둘러 따라가 붙잡았다.
"저기, 연정아..!"
연정은 잠시 멈칫하더니 혜유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혜유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도 똑같구나."
"어..?"
"너도 뒤에서 남 까내리는 것 말곤 하는 게 없다고."
"아니야, 연정아! 나는.."
연정은 더 이상 혜유의 말을 듣지 않고 화장실을 나가 버렸다. 그런 혜유의 모습을 본 다른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전교생 모두가 피하는 연정에게 말 한마디 걸었다고 다른 학생들도 혜유에게 조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혜유는 그런 학생들을 향해 물었다.
"재밌니? 남 괴롭히는 게? 너네들은 너네 재밌으라고, 스트레스 풀리라고 한 소리인지 몰라도 그 사람에게는 상처야. 알아?"
학생들은 혜유의 말에 그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아침에 친해지고 싶다며 혜유에게 아부하던 학생들조차.
".. 모르겠지. 너네가 그런 거 알았음 진작에 이런 짓 안 했을 테니까. 그만해라, 그런 짓들."
혜유는 화장실 안에서 연정의 흉을 보던 다른 학생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대로 반으로 돌아갔다.
연정은 교실 책상에 앉아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혜유는 조심스레 연정의 앞자리로 가 앉았다.
"저기.."
연정은 이제 혜유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혜유는 그런 연정을 보며 입술만 깨물다가 말을 꺼냈다.
"너무 상처받지 마. 그리고 난 너 흉 안 봤으니까.. 나도 걔네들이랑 똑같다고 보지 마. 난 너 흉 안 볼 거야."
".. 누가 뭐래?"
"그냥.. 네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사람 원래 안 믿어, 난. 넌 사람 믿어서 그렇게 하나 본데, 너도 믿다가 배신당하기 딱 좋게 생겼네."
".. 아무튼 아까 일은 잊어. 네 잘못 아니니까."
연정은 헛웃음을 짓고 고개를 들어 혜유를 바라보았다.
"너 나 동정하니? 불쌍해 보여서?"
"내가 널 동정을 왜 해?"
".. 아니다, 됐어. 너도 나한테 잘해주려고 하지 마. 너도 나랑 똑같이 되고 싶진 않잖아."
"너랑 똑같이 되는 게 뭔데? 너도 나랑 똑같은 학생이야, 똑같은 친구고."
"그래, 그것도 나야. 근데 진짜 나는 거기서 동급생들한테도 비난받고, 후배들한테도 비난받는 게 진짜 나야."
혜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로 돌아갔다. 연정은 다시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