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에서 셋이 되고
다음 날 아침, 혜유는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에서 혜선이 끝까지 잔소리를 했다.
"야, 너 집에 일찍 들어와라! 남자 친구 생기기만 해 봐!"
"언니나 잘하지, 또 나한테만 그런다."
"뭐야?!"
"혜유야, 잘 다녀와. 신혜선 이놈의 계집애는..!"
"아, 엄마..!"
혜선은 반강제로 혜유의 엄마에게 끌려갔다. 혜유는 피식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연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충 우유 한 컵으로 아침을 때우고 신발을 신었다. 연정의 뒤로 연정의 엄마가 정장을 입으며 연정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공부도 못하면서 아침이라도 제대로 먹지 그러니?"
".. 됐어요."
"우유값 비싸다. 뭐, 우리가 돈으로 쩔쩔매지는 않지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연정의 시큰둥한 대답에 연정의 엄마는 혀를 끌끌 찼다. 연정은 익숙하다는 듯이 현관문을 열었다. 뒤에서 연정의 엄마가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커서 뭐가 되려고.."
연정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집을 나섰다. 아침에는 이런 게 일상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흔한 풍경이었다.
연정의 집안은 남들보다 몇십 배는 더 부유했다. 연정의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대기업에서 일을 하셔서 연정은 갖고 싶은 건 모두 가질 수 있었지만 대신 사랑은 잘 받지 못했다. 그래서 연정은 사랑을 받는 것도, 사랑을 주는 것도 아직 익숙지 않았다.
연정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처음에는 이런 신축 아파트에 사는 것도 자랑거리였지만 이제는 조금 평범해지고 싶었다. 연정의 집안이 부유하다는 점을 노려 연정에게 다가오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혜유는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해 강당으로 갔다. 강당에는 이미 방송부원들 몇이 도착해 먼저 기기들을 다루고 있었다. 혜유는 재빠르게 방송부원들의 옆으로 가 함께 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캠코더를 설치하던 주환이 혜유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늦지 않게 잘 왔네?"
"응? 당연하지. 방송부가 어떤 동아리인데.."
"가끔 보면 네가 기장해야 됐었다니까. 기장인 나보다 매사에 열정적이니까."
"주환이 네가 나보다 더 열정적이잖아. 다른 선생님들도 방송부 얘기만 나오면 다 네 칭찬만 하시던데?"
"너도 나만큼 맨날 칭찬 들으면서?"
"그래도 너보다는 아니야. 나보다 네가 더 열정적이야."
혜유와 주환과 동급생인 소현이 둘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 사이를 끼어들었다.
"너네 아주 달달하다? 사귀는 거야? 방송부에서는 서로 연애 금지인 거 아는 거지..?"
소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혜유와 주환을 번갈아 째려보았다. 혜유와 주환은 피식 웃으며 동시에 답했다.
"안 사귀어. 걱정하지 마."
"너네 내가 지켜본다. 걸리면 가만 안 둬."
소현은 마지막까지 혜유와 주환을 노려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혜유와 주환은 서로를 쳐다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방송부원들은 쉴 틈 없이 강당을 휘젓고 다녔다. 사진 찍으랴, 영상 찍으랴, 음향 조절하랴, 자료 넘기랴, 방송부원들이 총 16명임에도 불구하고 부족할 따름이었다.
3시간 후, 공연이 끝나고 전교생들은 밥을 먹으러 곧장 급식실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연정은 무대 위에서 노트북 선을 정리하고 있는 혜유에게 다가갔다.
"밥 안 먹어?"
"응? 아, 먹어야지! 근데 조금 늦게 먹을 것 같네.. 먼저 먹으려면 먼저 먹어도 돼."
".. 아니야, 기다릴게. 천천히 해."
"그럼 땡큐! 빨리 끝내고 밥 먹으러 가자."
연정은 무대에 걸터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혜유를 기다렸다. 혜유는 재빨리 노트북을 정리하고 마이크까지 정리하고 나서야 허겁지겁 연정에게 달려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너무 오래 기다렸지.. 미안.."
"아니야, 얼른 가자."
혜유와 연정이 강당을 나서려던 순간, 주환이 혜유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걷기 시작하며 말을 걸었다.
"나 밥 먹을 사람 없는데 같이 먹어주면 안 돼?"
"네가 없기는 무슨.. 널린 게 다 너랑 먹겠다는 애들이야. 당장 급식실에 가서 같이 먹자고만 해봐라. 다 너랑 같이 먹겠다고 몰려들걸?"
"모르는 애들은 싫고.. 그냥 같이 먹자. 응?"
"싫어. 네 친구들이랑 드세요."
"아, 왜.. 내 친구들 전부 다 축구부라서 오늘 같이 급식 못 먹는대. 혼자 먹기는 외롭잖아. 제발.. 응?"
"난 연정이랑 먹을 거라니까..!"
주환은 연정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연정의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살짝 숙인 채로 연정에게 물었다.
"네가 연정이야?"
"어? 아, 으응.."
"무슨 연정인데? 이연정? 박연정?"
"김.. 김연정.."
연정은 코앞까지 다가온 주환의 시선을 피해 서둘러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같이 먹으면 안 돼? 나 진짜 밥만 먹을게."
"주환아..!"
혜유는 서둘러 주환을 말리며 연정과 주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왜, 나도 같이 먹으면 안 돼? 연정아, 같이 먹자."
"그, 그래.."
연정의 대답을 들은 주환은 날아갈 듯이 기뻐하면서 보란 듯이 혜유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지? 같이 밥 먹어도 된대."
"연정아, 진짜 같이 먹어도 돼? 안 불편 하겠어?"
"내가 뭐가 불편하다고..! 나도 그냥 밥만 먹고 갈 거거든?"
"연정아,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어.. 상관없어."
혜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정을 바라보았다. 연정은 그런 혜유를 살짝 올려다보며 입모양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급식실에 도착하고, 셋은 급식을 먹기 시작했다. 혜유는 중간중간 연정의 표정을 살폈다. 그럴 때마다 연정은 혜유에게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혜유와 주환이 한창 급식을 먹고 있을 때, 연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 먼저 가볼게. 숙제가 너무 많아서.."
"어? 같이 가! 나도 다 먹었어!"
"아니야, 천천히 먹고 와."
"진짜로 다 먹었어..! 같이 가자. 응?"
"정말 괜찮대도. 너 다 안 먹은 거 다 보여. 나는 다 먹었어."
"아무리 그래도.."
"먼저 가볼게."
연정은 주환을 향해 눈인사를 했고 주환은 그런 연정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