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고픈 아이는
연정은 그렇게 간식을 다 먹고 한참을 더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 눈을 뜨자 연정의 부모님이 집에 들어오신 건지 엄마의 짜증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줌마는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맨날 집을 이딴 식으로 청소하면서 돈을 그렇게 받아 가는 거야? 도우미를 바꾸던가 해야지.."
"조용히 좀 해, 당신. 내가 일하고 와서도 스트레스를 받아야 해? 오늘 피곤해."
"나라고 놀기만 한 줄 알아? 나도 일 했어, 일!"
연정은 살며시 눈을 떠 방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새 연정의 부모님의 언성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힘들다고!! 맨날 너만 힘든 줄 알아?!"
"나도야, 나도! 하.. 열받아서 정말 못살겠네!!"
머지않아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연정의 엄마가 온갖 짜증을 내며 연정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곤 연정이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는 걸 본 연정의 엄마가 방 불을 켜며 화를 냈다.
"뭐 하니? 시간이 아깝지도 않니? 잘 거면 침대에 가서 자던가, 공부할 거면 정신 차리고 하던가!!"
"엄마.."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공부 하나 못 하는 주제에 어디서 엄마라고 불러, 부르기는?"
연정은 엄마의 말을 듣고 충격을 먹어 그대로 얼어붙었다. 연정의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한숨을 쉬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연정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연정은 사랑을 주는 법도, 받는 법도 모른다. 사랑이란 게 무슨 뜻인지도, 사랑이 왜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연정에게 사랑이란 깨닫고 싶은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간 혜유는 빈 연정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담임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연정은 심한 감기에 걸려 나오지 못하는 거라고 했다.
학교가 끝나고 혜유는 곧장 주환을 찾아갔다.
"주환아, 나랑 연정이 집 좀 가자."
"연정이..? 아, 저번에 그 김연정?"
"응, 맞아."
"갑자기? 왜 가는데?"
"연정이가 오늘 학교에 안 나왔어. 감기에 걸려서 그렇다곤 하지만.. 많이 아픈 걸까 걱정도 되고,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물어볼 수도 없어."
"같이 가줄 수 있긴 한데.. 집 주소는 알고?"
"담임 선생님한테 여쭤 봤어. 집 주소 알아내느라 애 엄청 먹었다."
"알았어, 가자."
혜유와 주환은 집 주소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겨우겨우 연정의 집에 도착했다. 쉽게 집 앞까지 찾아갈 수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아파트 단지부터 보안이 철저했다. 몇 명의 경비원이 수차례를 교대로 오가는 모습을 본 주환이 혜유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 경비원은 어떻게 따돌리게?"
"네가 시간을 좀 끌어 주면 안 돼?"
"되겠냐고..!"
"일단 해 봐. 가!"
혜유는 억지로 주환을 경비원 쪽으로 몰았고, 주환은 그대로 경비원 앞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경비원은 주환을 보고 의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사는 학생 맞니?"
"어.. 그게.. 여기 사는 사람 좀 찾으려고 온 거거든요.."
"인증받아야 들어갈 수 있어."
경비원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주환이 황급히 경비원을 불러 세우며 연정의 사진을 보여줬다.
"이 학생.. 아시죠?"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이 학생 아는 사람이라고 그냥 들어갈 수는 없다니까 그러네."
"아, 잠시만요. 그럼.."
주환이 경비원을 잡아두는 사이, 혜유는 재빠르게 단지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혜유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혜유는 아파트 현관 옆 화단에 숨어서 사람들이 문을 열고 오갈 때에 같이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 여자가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혜유는 곧바로 여자를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혜유는 연정이 사는 층인 25층을 눌렀다. 그런데 여자도 25층을 누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곤 혜유를 살짝 쳐다보며 물었다.
".. 여기 사시는 분이세요?"
"네?"
"같은 25층 사는데 한 번도 못 뵌 것 같아서요. 아무리 요즘 시대가 이웃끼리 인사 안 한다는 시대라지만.."
"친구 집 놀러 왔어요."
혜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근데 왜 아까 현관에서 저랑 같이 들어오셨을까?"
".. 네?"
"친구 집 놀러 온 거면, 현관 비밀번호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인터폰이라도 하던가."
"음.. 그게.."
"몰래 들어온 거죠?"
".. 네."
혜유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여자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기세등등해져서 혜유를 꾸짖기 시작했다.
"당장 알릴 거예요, 경비원한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데 자랑스러워요?"
"아니요.."
엘리베이터가 25층에 도착하고, 여자는 혜유의 손목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누구 찾으러 온 건 맞긴 한 거예요? 나 이제 못 믿겠어."
"찾으러 온 건 맞아요.."
"누구 찾으러 온 건데요? 거짓말 칠 생각이죠? 도둑질하러 온 거예요?"
"네..? 도둑질이라뇨..! 김연정이라고, 친구 찾으러 온 거 맞아요."
혜유의 말을 들은 여자가 순간 흠칫하더니 당황했다.
"김연정..?"
"네, 김연정."
".. 네가 누군데 내 딸을 알아?"
"딸.. 이요?"
그 순간, 한 집의 현관문이 열리고 연정이 밖으로 나오다가 혜유와 연정의 엄마를 보고 놀랐다.